배 안 재일조선활동가의 목소리
최근 한 온라인 모임에서 재일조선적(朝鮮籍) 동포로 평생을 조선학교 육성에 힘쓴 배안(63) 선생님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학교의 출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련의 세월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었는데 한국과 미주와 유럽 등 온라인으로 연결된 참석자 모두가 눈시울을 붉히고 오뚝이처럼 일어난 동포들의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참석자는 60년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때 재일동포 북송을 반대하는 관제데모에 참석한 사실을 털어놓고 배안 선생님을 비롯한 재일조선적 동포들에게 사죄드린다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에 남게 된 재일동포들은 식민지 통치로 말미암아 일본 국적자였습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고 1952년 이 조약이 발효됨과 동시에 재일동포들은 모두 ‘조선반도 출신자’로 엮어졌고 이는 국적이 아니라 호칭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이를 기회 삼아 재일동포들의 일본주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게 됩니다. 이미 1948년엔 남북에 각기 정부가 수립된 것으로 인해 국적란에 ‘조선’이 아니라 ‘한국’ 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오긴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과 똑같은 무국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기를 원했던 분들은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므로써 비로소 실현이 되었고 일본정부는 정식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들(국민등록한 사람들)에게만 일본에서의 영주자격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한일조약은 재일동포사회 내부의 남북분단을 심화하고 첨예한 대결구도로 나가게 하는 요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재일동포들은 일본으로의 귀화를 꿋꿋이 외면하였습니다. 국적도 아닌 ‘조선’이란 그저 호칭에 지나지 않은 무국적자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단된 조국의 어느 한쪽의 국적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 ‘조선적’ 동포를을 낳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애국심이 투철했던 동포들은 2세들에 대한 민족 교육을 위해 일본 곳곳에 조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유형무형의 불이익과 탄압은 야비(野卑)하고 집요(執拗)했습니다.
조선학교 관계자들이 힘들어 한 것은 일본정부만이 아닙니다.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남측정부도 조선학교 와해(瓦解)를 위해 총력을 다했으니까요. 조선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대부분이 북정부를 지지했던 조련(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의 전신이 되는 조직. 호칭 ‘총련)과 밀접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배안 선생님은 말합니다.
“조선학교를 시작하고 이끌었던 분들은 해방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기다리며 싸운 분들이었고 애초부터 좌익적인 편향이 있긴 했지만 누구의 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의 정책과 행동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남정부는 조선학교를 적대세력으로 분류한 반면 북정부는 195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조선학교의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6.25 직후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참혹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통일조국의 국적을 갖고 싶다는 배안 선생님의 슬프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독자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동포들이 세운 조선학교, 일본정부 탄압 멈추지 않아’
“해방 직후 일본엔 약 240만명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어요. 6.25이후 민족교육이 위험한 상태가 되면서 재일동포들이 2세들의 교육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오두막집을 얻어서 동포들이 우리말 우리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남북분단을 고정화 시키고 재일동포들을 탄압했어요. 재일동포들이 모이면 일본을 비판하고 권리주장을 하고 통일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재일동포들이 큰 세력이 될까봐 경계한 것이죠. 그들은 재일동포들이 일본 좌익세력과 함께 일본사회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조선학교를 시작한 분들은 해방전부터 민족주의적일뿐 아니라 좌익적인 생각 가진 분들 많았어요. 49년에 일본정부가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습니다. 6.25이전에 전역이 강제 폐쇄된거죠. 일본경관대가 학교에서 애들을 쫒아내고 막으려는 동포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했습니다. 학교를 강제 폐쇄할 당시 한신 지역(주로 오사카 효고)에서 열여섯살된 김태일소년이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눈물) 그날부터 오늘까지 일본정부가 조선학교를 탄압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조선학교 입학 응원대
‘조선학교 입학식때 색동저고리 입는 까닭’
“6.25 끝나자마자 재일동포들은 다시 모여 학교 문을 열고 교육권을 찾으려고 힘을 합쳤습니다. 민족교육과 통일이란 다시 생각하면 조국 통일을 위한 이념과 활동가들 키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해요. 조선학교는 초등학교 입학식때 색동저고리를 입습니다. 중고등학교때는 치마저고리 입고 학교를 다닙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민족의식과 통일의식을 갖고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부모님들이 입혀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대가 바뀌고 1, 2 세대가 세상을 떠나도록 우리가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적 숙제를 풀지 못하고 또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저희가 뭐라도 해야 하는데 요즘 코로나도 그렇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조선학교 동포는 빨갱이? 머리에 뿔났는지 만져보더라’
“6.25이후 학교를 다시 시작하면서 일본의 탄압에 한국정부도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 한일수교를 계기로 조선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한국정부의 요망이 들어왔습니다. 한국정부는 정말 조선학교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조선학교에서 교육 받으면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말은 있어도 남조선을 없애자는 말은 들어본적도 없습니다. 남조선동포도 다 우리 동포 아닙니까. 어떻게 조선학교를 없애자고 합니까. 오래전 한국에서 친척이 왔는데 어르신께서 며느리를 데리고 오셨어요. 그 분이 저희 머리를 만지면서 정말 뿔이 있나 없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선 분단교육, 반공교육을 하면서 ‘일본에서 우리말 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고 못하는 사람은 쪽발이다라고 배웠다’고 합니다. 한국에 사시는 분들이 그런 교육을 계속 받고 있고 한국이 우리가 배운 것과는 딴판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학교 아이들 공연
‘4.19와 광주민주항쟁기 힘보탠 동포들’
“일본에서 동포들이 한국 민주화를 위해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4.19가 일어났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데모하는 곳에 못갔지만 4.19 2주년이나 3주년쯤 되서 아버지 손을 잡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집회에 참여한 기억이 납니다. 봄이 되면 4.19 집회를 위해 히비야 공원의 동포 모임에 항상 간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제 아버지 고향은 마산이어서 민주항쟁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민주화도 통일도 늘 마산이 일어나야 실현된다 하셨지요. (배안 선생의 부친은 재일동포자녀들의 민족교육발전에 평생을 바친 원로활동가중의 한 분이다.) 우리 재일동포들은 한국에서 학생들이 데모하면서 크게 탄압받거나 항쟁이 일어나거나 할적마다 대도시에 모이고 데모하고 전단지 뿌리면서 일본시민들에 알리고 호소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언론이 보도를 안하니 대부분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학 졸업 한 해가 1980년입니다. 대학 갓 졸업한 그때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이후에 부마항쟁 일어나고 어떤 방향으로 한국이 나갈 것인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80년 4월 도쿄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나다 보니 외신을 통해 정보가 들어오고 일부는 일본 매스컴에 보도 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장 힘을 넣었던 활동이 동포청년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리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 뭘 할수 있는가를 주제로 동포청년들과 학습하고 뜨겁게 토론을 했습니다. 도쿄2초급학교(한국에서는 에다가와학교로 알려짐)가 있는데 내가 활동한 지역이 에다가와 중심으로 한 곳이었어요. 이 학교는 2000년 들어가면서 도쿄도(都)가 ‘도의 땅에 부정점거를 하고 있다’며 ‘너희들이 이 땅을 돈을 내고 사라. 그렇지 않으면 나가라’는 위기가 있었습니다. 도쿄도가 제시한 금액이 엄청나게 큰 돈이었고 식민지 통치때문에 일본에 살게된 동포들의 역사, 교육권 등을 생각해도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했지만 1980년대 광주민주 항쟁을 지지하며 도쿄 한복판에서 데모하고 단식투쟁하기 등을 하면서 함께 싸웠던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동포들, 일본시민들, 한국 시민단체들과 힘을 모아 그 학교를 지켜냈습니다.
여담이 되지만 2001년에 광주로 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떤 심포지엄 발언자로 초청 되었는데 내가 어떤 낯을 들고 광주로 갈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너무도 작고 미약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거든요. 내가 발언 할 차례가 됐을때 ‘아무 보탬이 안된 행동이었지만 광주에서 민주항쟁 일어났을 때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싸웠는가’ 하는 얘기를 하니까 행사장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아무리 작은 힘이더라도 또한 멀리서 아무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더라도 마음을 함께 해주는 동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를 얻을수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피와 땀으로 얻어진 재일동포권리’
“이념을 행동으로 연결할때 결실이 이어집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일 조선동포들은 일단 해외로 나가면 일본에 거의 돌아올 수 없었어요. 재일동포 권리는 피와 땀으로 얻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동포들은 해방직후엔 부동산을 가질 권리도 없었습니다. 해방직후 조련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일본정부와 싸워서 권리를 얻었습니다. 재일외국인들의 권리문제 강연하다가 알게 됐는데요. 일본에 ‘생활보호제도’라고하는 것이 있는데 생활이 어려운 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제도입니다. 생활비, 집세, 의료비 등 지원하는 그런 제도입니다. 그러나 동포들은 정식 적용이 아니라 ‘준용’으로만 신청할 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신청하다 행정에서 거절하면 일본국적 가진 사람들은 이의신청(異議申請)할 수 있지만 외국인들은 재신청도 의의신청도 못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의무교육권은 일본국적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조선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학교도 일본정부에 의하여 정식인가 된 학교가 아니며 외국인 아이들은 학교가든 안가든 상관안합니다. 일본학교 다니고 싶으면 거절하지는 않겠다는 정도에요. 재일외국인들은 의무교육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76년까지만 해도 공용주택에 재일동포들이 입주도 못했습니다. 조선학교나 다른 외국인학교들이 사립학교 인가를 못받기때문에 스스로 자력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너희들이 좋아서 민족교육하는거니까 알아서 해라’ 식입니다. 80년대 들어 일부 지방지자체에서 조선학교와 외국인학교에 보조금을 주게 됐는데 10여년전부터 북의 핵개발 미사일 실험을 핑계로 ‘조선학교는 북과 이어진 학교이며 납치문제가 해결 못한 상황을 감안하고 교육보조금 지급 않하겠다’며 또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돌이켜보면 민족교육은 동포들에게는 커뮤니티의 중심이지만 적대세력에 있어서는 공격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남북코리아와 일본의 아이들 그림전시회
‘조선학교 없애려는 남, 공장 못지어도 도왔던 북’
“지금 재일동포들이 많이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요새 사업하는 분들 말씀 들어보니 은행 융자도 잘 안해주고 사업전개도 아주 힘들어요. 지금 코로나때문에 경영이 어려울수도 있지만 특히 재일동포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탄압이란 것이 가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얼마전 나한테 은행에서 편지가 왔는데 저의 모든 정보를 대라고 했어요. ‘이 편지를 반송을 안하면 거래를 중지할 수 있다’는 협박성 표현에 너무 화가 나서 이걸 어디에 호소할까 생각중입니다. 이렇게 탄압하고 못살게하는 조건에서 살아왔기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정부에 반감 안가질 수 없고 단결해야 했고 민족적 정체성을 중요시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을 한국에선 절대 해외동포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북은 조선적, 한국적, 심지어는 일본국적 취득자들도 모두 다 끌어안고 ‘재일동포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 여깁니다. 1957년 북에서 민족교육과 장학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일본돈으로 1~2억엔이었고 해마다 송금됩니다. 지금 도쿄에 자리잡은 조선대학은 그때, 그 돈으로 짓게 되었고 조선학교운영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본대학, 전문학교 등에서 배운 사람들 비롯하여 수많은 동포들이 이 장학금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북에서 민족교육에 관심 많았던것이 사실입니다. 김일성주석은 ‘공장 하나, 둘 못짓더라도 일본내 민족교육은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6.25이후 폐허 되버린건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지만 북은 그런 상황에서도 조선학교를 도왔어요. 전후 복구를 위해 건설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공장 하나 못짓더라도 돈을 보내야 한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선 계속 조선학교 없애라고만 했습니다. 과연 동포들이 누구를 따르게 될까요. 자주성을 보이는 북에 동참하게 되고 분단을 지속하고 재일동포를 탄압하는 남을 어떻게 지지하겠습니까. 정치적 사상적 교육이 아니라 민족적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조선학교가 재일동포들의 권리를 따냈고 이것이 민족의 통일과 절대 뗄 수 없는 과제였다는것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요코하마에서 ‘비빔밥 네트’, ‘더불어 투어’ 등 일본 시민들과 함께 조선학교를 알고 재일동포들을 알기 위한 학습회, 학교 방문 투어 등을 실시하고 일본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 편견과 차별의식을 없애고 조선학교를 바로 알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1년 일본인 납치사건이 밝혀진 뒤 조선학교학생들에 에 대한 폭언, 폭력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에 나섰습니다. 그때 요코하마에서는 일본시민들이 조선학교에 입학을 하려는 아이들을 응원하기 위한 “조선학교 입학응원대”를 무어 가나가와 현하 5학교를 찾아 아이들에게 축북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활동은 코로나 때문에 2020년에는 실시 못했으나 변함없이 계속 되는 행사입니다. 이렇게 조선학교는 이미 우리동포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본사회에 있어서도 귀중한 재산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조선학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일본과 남북 우리나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 갈수 있으면 합니다. 이것도 틀림없이 통일에로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조선학교 입학응원대
◇ 청중 질문
<질문자 1> - 중3때 서울에서 관제데모에 동원됐습니다. 1963년 재일동포 북송을 반대하는 데모에 많이 나갔습니다. 오늘 이자리에 동포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를 드립니다.
“당시 북에 간 것은 경제적 측면도 있겠지만 아이들 미래를 생각했을 때 가야만 했던 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친구들도 부모님 일본에 계시고 북에 간 경우가 많습니다. 70년대 들어 남쪽에 온 동포 유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조국을 알고 싶다, 조국을 배우고 싶다해서 왔는데 한국서 대학생활 할때 조사받고 안끌려갔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남산에서 고문받았다고 합니다. 호주인 친구가 있는데 남편이 재일동포입니다. 그분은 대학을 한국에서 다녔는데 호주인 애인 아버지가 주일 호주 대사였기 때문에 제외됐는데 호주인 친구 말이 재일동포는 총련이 아니더라도 다 간첩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그정도로 눈엣가시처럼 생각했어요. 그냥 저희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마산 출신이고 마산의 자랑이 큰 분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이어가는게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2> -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쪽은 주권자의 뜻대로 정부가 선택되거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곡됐고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언론마저 못된 정권과 한패거리가 되어 분단을 악용하고 일제 매국노가 정치에 이용했습니다. 박근혜 탄핵때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를 외쳤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20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조선적 동포들이 모든 질곡을 이겨낸 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완전 독립, 나라다운 나라, 통일을 지향하고 다시는 외세 재침탈을 막아야겠습니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질문자 3> - 조선대학교 나온 학생들 진로가 어떻게 되나요?
“남편은 조대(조선대학)를 졸업했는데 조대졸업생 최초로 일본 사립대 대학원에 직접 진학했습니다. 일본 대학원에 가서 박사까지 하고 같은 대학 교수로 일하다 올해 정년퇴직 합니다. 일본에서 자연과학은 사회과학보다 차별이 적은 것 같습니다. 남동생도 조대 졸업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사회과학은 거의 거절해서 릿교 대학에 갔습니다. 누거 쥐어준 권리가 아니라 우리 노력에 의해 문이 열리고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조대 졸업후 유명 기업에 취직하는 분들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회사에 들어가도 50세쯤 되면 ‘일본 국적 가지면 어떻겠냐’고 나옵니다. 그렇게 안하면 계속 있어도 출세는 못합니다. 아직도 충분치 않지만 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빠찡꼬나 불고기(야키니쿠) 장사가 아니라 우리 실력과 요구에 맞는 취직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아들은 고등학교를 조선학교 나오고 대학은 일본 학교 갔는데 좋은 학교 석사 졸업하고 유명한 기업에 들어갔다가 독립하며 회사 경영하고 있습니다. 딸은 박사 졸업하고 대학 교수로 일합니다. 우리는 길을 닦으면서 가야 합니다.”
2014년 평양의 동창생들과 함께 한 배 안 선생 <이상 사진 배안 활동가 제공>
<질문자 4> - 북송선 타고 갔다가 다시 탈북한 분들 중에 이런 얘기도 합니다 ‘가서 보니까 유리천정이더라. 북송선 타고 간 분들 대부분 올라가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데요. 만경봉호 타고 간분들 어떠했는지 목소리를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북에 갔던 분들 얘기 하셨는데 전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회든 차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들 권리 위한 활동하면서 봤지만 일본도 100여년전 해외 이민 많이 했는데 그 자손들이 일본에 와도 어마어마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내가 90년부터 92년까지 미국 살아봤는데 백인, 흑인 차별이 심했습니다. 차별이란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나 존재하고 그게 없다는건 있을수 없습니다. 북정부가 (귀국 재일동포들을) '계속 배려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북에 귀국한 분들의 일부 얘기는 북정부가 나쁘고 잘못했다는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차별로 생각해야 합니다. 북의 인권을 지키라는 미국의 이야기는 말도 안되고 자기 일이나 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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