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끝나고 새해가 됐는데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이 서울에서 날라 왔다. 2015년의 지각카드일까? 아니다. 2016년에 첫 번째로 받는 크리스마스카드 일게다.
“등촌형님, 이메일이 불통이라서 구식카드를 보냅니다. 한강 갈대숲을 거닐면서 형과 대화를 나누던 그 옛날 등촌동 시절이 그립습니다“
여창(旅窓) 현해춘목사. 도원결의는 안했지만 형제처럼 생각하는 친구다. 여창은 나에게“형제는 수족이요 처자는 의복”임을 깨닫게 해준 동생이다. 영등포구 등촌동에 있는 나사렛신학교에 다닐 때였다. 입학시험을 치룬 수험생 2명이 기숙사 내방에 끼어들어 자게 됐다. 거들떠 보지를 안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말이 많았다. 자다 일어나 보니 아직도 토론중이다.
“야, 너희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대냐? 그렇게 아는게 많으면 신학교 들어올 필요가 없지. 잠 좀 자게 입 꽉 다물고 있어!”
나의 함구령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상판떼기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아침에 보자. 다음날 눈을 떠보니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기전에 도망 가버린 모양이다. 범인얼굴을 놓쳐버린 기분 이었다.
난 주일마다 신학교강당에서 중고등학생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가 시작할 때면 신학생 한명이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끝나면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 누굴까? 한번은 예배가 끝날때까지 남아있기에 덮치듯 다가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그가 내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부터 형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신입생 현해춘이라고 합니다”
내방에서 자던 그 수험생이었다. 신학교에 와보니 선배들도 후배들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퍼부어대는 반말짓거리 욕설에 질려버렸다. 더럽고 치사하다. 그는 날이 밝기전에 내방을 탈출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저렇게 안하무인일까? 슬그머니 중고등부 설교시간에 잠입하여 내 설교를 도청해본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내손을 잡고 형님! 이라 부른 것이다.
방학이 되면 신학생들은 기숙사를 비우고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오류동 근처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는 우리집을 찾아왔다. 시골방 두개를 하나로 터서 교회겸 살림방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반갑지만 수상해서 물었다.
“강화에서 교사로 있는 자네형님한테 가면 형수대우가 융숭할텐데? 왜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는 우리집으로 피난오는 거지?”
그는 황해도에서 월남한 피난민이었다. 2남2녀의 막내인데 형과 누나들이 모두 결혼하여 흩어져 살고 있었다.
“형도 자식을 나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우리남매들이 우애가 좋았어요. 그런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결혼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눈치가 달라지더라구. 차라리 형(계선)이 스스럼없이 좋아서 여기로 온 거요”
나를 혈육처럼 믿어주니 고마웠다. 속에서 의분이 끓어올라왔다.
“삼국지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소패성을 지키던 장비가 술을 퍼마시다가 여포에게 성을 빼앗기고 멀리 출정중인 유비를 찾아가 죄를 청했어. 유비의 처자식이 여포에게 붙들려있는걸 알고 유비앞에서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지. 그때 유비가 울면서 이런 말을 했다네. ‘兄弟如手足,妻子如衣服。衣服破,尚可縫;手足斷,安可續?(형제여수족 처자여의복 의복파상가봉 수족단안가속). 형제는 손발 같고 처자식은 옷과 같아서, 옷이야 찢어지면 다시 기우면 되지만, 손발이 잘리면 어찌 다시 붙이겠는가? 자식을 잃으면 또 나을수도 있고 재혼하면 또 아내를 얻을수 있지만 형제는 잃으면 그만 아닌가? 우리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결의로 형제가 됐으니 그 귀함이 어찌 처자식에 비하겠는가!’ 도원결의한 의형제뿐이 아니었네. 유비는 오호대장(五虎大將) 관우 장비 조자룡 황충 마초를 형제처럼 아꼈지.”
중학교때 삼국지를 열 번이나 읽은 나는 거침이 없었다. 아내가 끼어들었다.
“도련님, 미닫이를 닫으면 방두개가 되니 방학한달 동안 다른데 가지 말고 같이 지내요”
우리는 그날 도원결의(桃園結義) 형제가 된 셈이다. 처자식보다 형제를 더 중히 여기리라는 나의 가족관도 그날 생겨났다. 그렇다고 내가 처자식 사랑을 소홀이 하는건 아니다. 처자식 사랑하는 자만이 형제를 사랑할수 있으니까.
그때부터 현해춘은 관우 장비급의 동생이 됐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자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찾아와 열흘을 묵으면서 우정을 즐겼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난 즐거운 회상에 젖는다. 몸이 불편한 아내가 한국에 가면 두달이고 몇 달이고 자기집으로 모셨다. 잘 사는 친정과 시가(媤家)가 있건만 아내는 눈치 없게도 현목사 집만 찾았다.
현해춘목사는 나사렛신학교가 있던 등촌동에 등마루교회를 개척하여 37년을 섬겼다. 나사렛대학교이사장, 나사렛교단 감독을 지냈다. 독서광이요 공부벌레다. 인격은 더 훌륭했다. 안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화. 호랑이선생으로 유명한 정시우교장선생님이 현해춘학생에게는 반말을 쓰지 못했다. 사람 됨됨이가 대개 그랬다. 목회 40평생에 현해춘만한 인격자를 만나본적이 없다.
그는 5척단구에 지구만한 머리를 이고 다녔다. 나 역시 머리가 큰편이라 우리둘이 나란히 걷고 있으면 얼굴만 보였다. 미국선교사집에서 일하는 예쁜 아가씨 양덕화는 우리만 보면 두 개의 지구가 걸어 다닌다고 놀려댔다. 지구가 아니라 우주였겠지. 만나면 별(?)걱정을 다하면서 밤을 지새웠으니까.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세모도 지나갔다. 새해가 밝아왔다. 구랍(舊臘)31일 밤 12시,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보내려온 은범이가 물었다.
“아빠가 지나온 세월에 아쉬웠던일은 뭐예요? 그리고 새해의 꿈이 있다면-”
“지나온 75년이 고맙기만 하다. 10불을 내고 100불짜리 고급뷔페를 먹은 기분이지. 실력도 없고 열심도 부족한데 대우를 많이 받고 살아왔으니까. 사랑, 직업, 가정에 만족한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고향의 형제자매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거란다. 2년전에 어머니 101세에 돌아가시고 지난해에 막내동생 완이가 60세에 가고 나니 남은 6남매가 보고싶어 밤마다 꿈을 꾼단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형제자매가 있어도 한국가고 싶은 맘이 없어진다고 하던데요?”
“나도 그럴줄 알았는데 정 반대로구나. ‘처자식은 의복이요 형제는 수족이라는 삼국지’를 열심히 읽은 덕분인것 같다”
난 파킨슨 때문에 한국여행이 어렵다. 그러나 걱정없다. 나에게는 미국에 현해춘목사같은 형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은퇴후 형님이라 부르는 선배목사님들이 많이 생겼다. 나를 형님이라 부르는 후배들도 늘어나고 있다. 뉴저지의 여자목사는 날 계선형이라 부른다. 오빠라고 불러주면 더 멋질텐데.
25년전 미국남부숲속에서 고담준론을 즐기는 여창과 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