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 가사를 읽으면서, 북조선에 도착하는 날부터, ‘조국(祖國)’ 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강하게 들어왔다.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고 느껴보지 않은 감정이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노래가락 자체가 대단히 낭만적이고, 애타는 어머니, 고향, 조국에 대한 사랑의 글에 눈물이 났다. 나의 형제, 동포들이 고난의 행진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는 국민들을 바라보는 어머님과 같은 장군님의 마음, 또한 얼마나 아팠을까…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감정들이 스치며 동시에 나 자신의 힘들었던 지난 50년 이민 생활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면 또 눈물이 나왔다. 나는 한번도 내 이민 생활에 대해서 힘들다고 눈물을 흘려 본적이 없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지켜주는 조국이 없어서 해외로 떠도는 동포들이 생각났다. 나 자신이 마치 어버이가 된것같이. 우리가 이민자로서 살기위한 투쟁은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고난의 행진’ 등 공화국을 세운지 70년동안의 투쟁은 조국을 세우고 보호하기 위한, 살아남기위한 우리 민족의 싸움이었다. 그러한 조국이 있어서 일심단결해 지켜나갔다는 것은 미처 상상을 못했었다.
북조선 사람들에게 조국은 어버이 수령이고, 김일성 주석이다. 김정일 주석 타계 후에는 두 사람이 그들의 어버이 수령이 된 것같다. 사람들은 이 대를 잇는 북조선을 3대세습이라고 하며 비웃는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북조선의 전쟁 상태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같다. 다시는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나라를 국민을 보호하려면, 그 목적을 가지고 계속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나가는 길인 것 같다. 그렇게 70년동안 뭉쳐서 살아온 나라가 지금의 북조선이다. 이런 생각을 북조선의 한 작가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보호정신’이라고 표현한다. 또 내가 최근에 제주해녀에 대한 책을 쓰다가 알게된 제주의 고된 식민지 역사, 같은 민족으로서 그들이 속하는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 이 모두가 국민을 보호해주는 조국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민족에 대한 연민의 정이 파도처럼 내 심장에 물결쳤다. 내가 마치 그 사람들의 어버이가 된 것같이… 내가 묵었던 초대소 방에서 찾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제일 동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
물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오갈데 없던 신세 건져주시고
삶의 길 밝혀주시는 어버이 수령님
인자하신 그 영상을 우러봅니다.
…
이 노래를 읽으면서 그와 비슷한 ‘오갈데없는 신세’의 감정을 표현한 제주의 강통원 시인의 ‘무적’ 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
언제부터인가
닻줄이 끊기어 표류하는
제주도는 한척의 배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가없는 하늘과 수평선이다.
…
누구의 입김인가
때때로
짙은 안개가 밀려와서
하늘과 지평선을 지워버린다.
무적이 흐느낀다
생명의 둘레
하늘과 바다에 길이 막혔다
소리가 있을뿐
빛이 없다
빛이 없는 캄캄한 항로에
제주도는 좌초하였다
……
배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다는 제주도인의 의식과 정서…. 일본식민지 시대 때 제주도인에게는 그들을 돌보아주는 지도자도 없었고 조국도 없는 좌초한 배였다. 얼마나 가슴 아픈 시기였던가.
북에서 해외 동포는..
김일성 수상은 해외동포들을 자신의 인민으로 생각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한 예를 들면, 일본에 사는 조선족이 일본 정부에게 천대받고 국적도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을 북조선으로 받아들였고 재정적으로 도와서 450개의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수가 많이 줄었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자기들이 조선인이라고 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북조선이 조국이다. 일본 조선인 예술가들이 즐겨서 부른다는 ‘조국을 노래하네’의 가사가 그들의 정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노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수령님 계시는 곳 조국에 올라가라
우리글을 빼앗기고 우리 말 빼앗기여
암흑의 그날 그날 얼마나 분했었나
……
여러 해외 동포들중에서 일본 해외동포들은 수도 많고 경제적으로도 많이 성공하여, 평양에 자신들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을 세웠다. 러시아에서 온 해외동포들도 만났는데 ‘러시아 고려인 통일 연합회’ 회장은 4세대 째 되는 러시아인이라고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해외동포들이 제각기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겉모양을 보고서는 분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판문점 회담에서 말했듯이. “우리 함께 상에 앉으니 북쪽사람인지 남쪽사람인지 분간을 할 수 없네요 “ 이렇게 해외동포들이 함께 만나서 조국을 찬양할 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감개무량 한 일이다.
일본 동포들이 평양에 지은 호텔
이러한 북조선의 해외 동포를 대하는 태도를 나는 북한지도자와 그 국민들의 ‘포용성 (inclusiveness)’ 이라고 보고 싶다. 그러한 포용성은 얼마전에 한국을 방문한 북조선의 현송월 가수의 노래 ‘백두와 한나’, ‘독도는 내조국’ 이라는 노래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한나산(제주)은 긴 역사상 조선반도의 한부분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한나(제주)는 “물건너 사람들” 이라고 업신 여겼다. 또 북조선의 포용성은 외국 입양아들의 역사가 없었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국민들이 배가 고프고 나라가 가난하고, 외화(外貨)가 필요했어도 아이들을 나라 밖으로 팔지는 않았다. 나는 몬트리얼 에서 몇명의 외국으로 입양된 한국아이들을 만나며 가슴아파한 적이 있었다. 이 입양아들은 내가 만났을 때는 이제 대부분 성인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다. 성인이 된 그들의 한국사회 비판은 예리하다.
중앙보고대회 (4월 14일)
아침에는 중앙 보고 대회를 들으러 갔다. 강연은 대동강 외교단 이라는 큰 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를 위해서 북조선에 온 약 150명 되는 해외동포들이 모였다. 여자들은 가능하면 전부 한복을 입으라고 했다. 나는 한복이 없어서 초대소에서 빌려주었는데 다행히 몸에 딱 맞았다. 회관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해외동포위원회 안내원들이 한 사람씩 자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한 여인이 강연을 하는데, 그야말로 웅변(雄辯)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애민정신, 애민 업적, 그의 정치에서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 기쁨과 슬픔도 인민과 함께, 김일성 주석은 조선을 찾기위해서 조선을 떠났다. 평양의 첫 폭격도 인민과 함께 겪으셨다. 인민의 옷을 해입히기 위해서 청진 화학섬유 공장을 세우셨다. 나라정사를 보며, 농사일을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흰 쌀밥을 먹일수 있나 궁리하셨다. 북조선은 사회주의 모범의 나라이다. 핵무기는 조선의 전략 3대 자산, 북남관계의 발전, 인류의 미래가 어디에 있나? 역사는 정해져있다...”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 있는 웅변이었다.
4월 15일 - “태양절” - 태양궁전 방문
오늘은 김일성 주석 106돐 탄생일이라고 한다. 주석을 태양에 비교하는 뜻이다. 태양궁전에 모셔놓는 김일성-김정일 묘지(열려있는 관)를 방문하는 행사이다. 건물은 참으로 큰 궁전이었다. 건물안에 들어가서 약 1km 되는 ‘구르는 전기 양탄자’를 타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이 평소에 여러 나라에서 받은 선물, 명예상 등등을 전시해놓은 여러개의 큰 전시장을 지나, 마지막에 김일성 주석의 열려져있는 관이 있는 큰 넓은 홀에 도착했다. 네 사람씩 한 팀으로 관에 다가가서 발쪽에서, 또 양쪽 머리 옆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라고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김정일 장군을 모셔놓은 방에서도 같은 식으로 인사를 했다.
굴러가는 전기 양탄자는 엣날에는 없었는데 새로 만든 것이란다. 김일성 주석, 김정일 장군을 방문하는 인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뜨거운 날이나 비가올 때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굴러가는 전기양탄자를 만들고 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이 궁전은 돌담으로 둘러 싸여져있는데, 돌담에는 학이 새겨져 있다. 학은 장수(長壽)를 뜻한다고 했다. 북조선의 지도자, 어버이의 기억과 가르침은 영구하다는 뜻인 것 같다.
대학 방문: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
태양궁전 방문후에, 다음 프로그램은 새로 생긴 대학 방문이었다. 이 대학은 유치원 국민학교 선생을 교육시키는 곳이다. 북조선은 어린이 교육을 중요시 하는 나라이다. 특이한 점은 교실에서 하는 수업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선생이 학생들과의 상호작용, 컴퓨터 대화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어린이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어린이를 다루고 수업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교과서는 냄새, 소리까지 다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또 붓글씨 연습을 하는데, 먹을 갈아 하는 대신 특별한 종이와 필터(여과기)를 써서, 붓으로 글을 쓴후에, 필터를 올리면, 쓴 글이 없어져버렸다. 이런 기술을 이 학교에서 발달시켰다고 한다. 너무나 놀라운 것들을 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유감스럽게도 사진찍는것을 깜빡했다.
일반 식당에서의 점심식사
초대소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려서, 시내에 있는 음식점으로 가기로 했다. 오리고기와 양고기를 상에서 숫불에 구어서 먹는 불고기 식당인데 양이 꽤 많아서 고기가 남았다. 고기를 먹은 후에는 냉면이 나왔다. 음식이 아주 맛있었다. 여섯명이 아주 배부르게 먹고 남았는데 미화로 54불을 냈다. 이런 금액은 평양에 사는 사람은 낼수 없는 액수인 것 같았다.이 식당에서도 그렇지만, 모든 식당들이 전기를 켜지 않은 것을 보면, 전기를 대단히 아껴 쓰는 것 같다. 호텔 내부에 있는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동포 에술가 - 4월의 봄 친선 예술 축전
오후에는 해외동포 련환 공연을 관람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온20명의 가수들의 노래, 악기, 춤 공연이 있었다. 대부분의 노래가 조국을 그리워하는 노래, 수령님에 대한 감사였다. 여기에서 공연한 모든 예술가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북조선은 음악과 예술을 중요시 한다. 특히 음악은, 한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무기”라고 한다. 그래서 크고 웅장 한 공연장을 짓고 민중들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평양에서 방문한 큰 공연장 만해도 3개나 되었다. (동평양 대극장, 평양 대극장, 소년 어린이 궁전 대극장… )
저녁 만찬 - 인민 문화 궁전에서
이 만찬은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가 해외동포들을 환영하기위해서 준비한 것 같다. 손님으로 온 동포들을 잘 대접하는 뜻에서 굉장한 성찬(盛饌)이었다. 적어도 15 코스는 되는 것 같았다. 메뉴를 가방에 집어 넣는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손님들이 전부 앉은 후에 로동당 간부들이 앞에 준비해놓은 긴 테이블에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단지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저녁식사를 즐길수가 없었다.
만찬 테이블에서
4월16일 (월요일) - 관광
호텔, 백화점, 지나가면서 보이는 대동강 낚시꾼
아침에는 캐나다 그룹이 둘로 갈라졌다. 회장님은 해동(해외동포 위원회) 부국장과 캐나다 동포사회에 대해서 좌담을 한다고 했고 나와 WB씨는 백화점과 상점 관광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간곳은 조선우표사, 광복백화점, 미래백화점, 해동산 호텔 (이 호텔 상점에서 손녀딸에게 주려고 인형을 하나 샀다) 이었다. 조선 우표사에서는 기념우표를 살수 있었다. 나는 2개의 우표를 샀다. 하나는 70주년 공화국 창설 기념 우표 - 김일성 장군이 이끄는 혁명군들을 그린 그림, 또 하나는 12개의 동물 그림…. 이곳이 우편국이냐고 물었더니, 우편국은 아니라고했다. 그러면 기념사진들을 우표모집 하는 외국인들에게만 파는 곳인가? 미래 백화점에서는 여행가방을 사려고 하니 그것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라고 했다. 북조선에서 만든 것은 없느냐고 했더니, 여행가방은 일반 시민 필수품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국내에서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북조선의 방침은 인민의 생활을 발달시키기 위한 것부터 만든다고 했다. 예를 들면, 가방공장, 젓갈공장, 아이들 신발공장, 치과 위생품, 이불공장, 화장품공장 등의 필수품을 만들어낸다고.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북조선의 대부분 여자들이 쌍거풀 진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물어보니 수술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성형을 사치로 여기는 것 같은데, 북한에서는 필수적인건가?
광복 백화점에서는 나와 함께간 WB씨가 남자 바지가 아주 싸다고 바지를 7벌이나 샀다. 하나에 7000원이라고 하니, 미국돈으로 1불이 미처 안된다. 통일 시장은 안내원과 나혼자만 갔다. 마치 제주도 5일장을 상기시키는 장마당인데 조그마한 매대에 3-4명의 여자들이 앉아있었다. 그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매대를 쓰는 지 아니면 함께 일을 하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사진은 찍으면 안된다고 했다.
대동강 낚시꾼들
초대소와 시내를 차로 왔다갔다 하노라면 언제나 대동강을 지나게 된다. 대동강은 이름만 들어보았지 처음으로 보는 강인데, 어쩐지 정들어 보인다. 특히 낚시꾼들의 모습은 50년전 내가 마포강변을 산보할 때 본 낚시군들을 생각나게 했다.
중국 고전 발레 무용극 - 붉은 녀성 중대
오후 3시에는 중국 고전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갔다. 200명의 단원이 왔다는데 중국 주석 시진핑의 특별 선물인 것 같다. 이 200명의 단원이 평양에서 제일 좋은 고려호텔을 독점해버려서 우리 캐나다 팀은 초대소로 가게 된 것 같다. 1964년 9월26일에 처음 공연된 중국의 고전발레 무용극은 중국에 잘 알려진 중화민족 20 세기 무용 고전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어 2012년 문화부 제2차 우수보존극 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줄거리는 1930년대 중국의 해남도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악질 지주집에서 뛰쳐나온 시녀 경화가 홍군의 당대표 홍상청과 전우들의 도움을 받아 피어린 전투과정을 통하여 원한 맺힌 농촌 시녀로부터 점차 혁명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중국 여성의 굳센 혁명정신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고전 발레 무용극의 남자 주인공 마효동, 중앙 발레 무용단
4월 17일(화) - 호텔 좌담실에서
이송철 교수의 강연이 초대소에서 있었다. 그 내용은 북조선의 발전상에 대한 것인데 간략해서 아래 내용이다.
“북조선은 나라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략국가가 되어야한다.
남에게 의존해서는 자립국가가 될수 없다.
김일성대학에 원자력 공업과를 만들었고 핵무력 완성의 길이 열렸다.
자력 자강의 힘으로 일어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신력, 과학력, 기술과학기술을 위한 장소, 국가 과학원을 만들고 그 과학자들이 걱정없이 일을 할수 있도록, 려명골 동네 아파트 건물을 시내에 지었다. 이 아파트는 방이 130평이고, 베란다가 85평 이다.
그 결과 북조선이 군사 강국이 되었다.”
글 사진 | 박옥경 몬트리올대 객원연구원 / 사회인류학자
박옥경 교수
박옥경 교수는 현재(2018) 몬트리얼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이다. 퀘벡시에있는 라발대학에서 사회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 논문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있는 모계 사회의 특이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를 다루었다. 논문외에 여러개의 글을 아카데믹 저널에 발표했다.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20년동안 사회 개발 문제 (특히 여성의 사회적 위치) 고문으로 일을 했으며, 2010년 은퇴후에 제주도 해녀에대한 연구를 시작해, 제주대학에서 여름학기 강의를 하며 스위스에 있는 재단에서 연구비를 얻어 현지답사를 했다 (2016). 그결과로 2018년 10월에 이연구 재단에서 (Fondation Barbiere-Mueller) 책이 출판됐다. 책제목은 <이중 신화, 신유고사상과 제주의 해녀> (Dual Mythology, Neo-Confucianism and Women Divers of Jeju, Korea). 이 책은 제주의 해녀 사회와 수마트라섬의 모계사회에서 비슷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