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2월 뭔가 내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양쪽 가슴에 서로 다른 종류의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호기롭게 수술까지 마쳤는데 항암치료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술회복과 표준치료를 준비하는 3주간의 휴식기에 이르자 현실적인 문제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병원도 주치의도 주위 암치료 경험이 있는 사람 그 누구도 그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막상 항암치료 날짜를 받고 퇴원해서 보니 그제서야 이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에 봉착했다. 하도 급하다고 병원에서 서두르는 바람에 진단받고 수술하기까지 보름이 채 안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 질문하지 않은 후과를 톡톡히 치르는 거였다. 그제서야 치료가 현실이 되면서 과연 이걸 혼자 힘으로 할수 있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큰아이는 3월에 대학진학으로 집을 떠났고 작은 아이는 기숙사가 있는 타지역 고교 2학년이었다. 남편도 충주에 이어 강릉으로 인사조치되어 6년째 주말부부로 살고 있던 터였다. 방광암을 겪은 시부께서 밥짓는 냄새, 음식냄새, 온갖 냄새에 몹시 괴로워하시던 걸 곁에서 지켜봤기에 항암과 항암 사이의 휴지기(休止期)를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버님 간병을 하시며 너무 힘드셨던 어머니는 겁도 걱정도 사서 하는 분인지라 길게 여행간다고 말씀드리고 수술을 했기에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섭생이 중요한데 밥은 어떻게 해먹고 열이 오르거나 이상반응이 있으면 바로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곁에는 자매처럼 챙겨주는 몇몇 지인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자기 일상이 있는데 무시로 불러 도움을 청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들갑떠는 것 같아 도저히 감출수 없는 몇몇에게만 알리고 수술도 조용히 한지라 지인들에게 내가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냐 서운하다 지청구를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있는 강릉에 내려가 바닷가에 작은 달세방을 얻어 아산병원에서 표준치료를 하면 좋겠다 싶어 남편에게 발품을 팔게 했다. 번잡하지 않은 작은 바닷마을이 좋겠고 가까운 곳에 솔밭길이 있을 것과 걸어서 간단한 장도 볼수 있는 곳을 주문했고 적당한 후보군을 알려왔다. 그곳에서 투병일지도 쓰고 그동안 바빠서 못쓴 에세이도 쓰는 등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쓰는 것도 좋겠다 싶어 치료를 하러가는 건지 휴가를 가는 건지 헷갈릴만큼 부풀었는데 아뿔싸 그해 겨울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나와서 깜놀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그건 그때가서 궁리하자 싶었다.
그래, 그동안 혼자 애들 건사하랴 어머니와 관계유지하랴 일하랴 정신없이 살았는데 신혼 기분 내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들녀석은 수월성 교육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만류하는데도 고집을 부려 외지로 가서 속상하게 하더니 그것도 오늘을 위한 거였나 싶어 고마웠다. 일이야 어차피 머리도 다 빠질 터라 가발을 쓰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 1년쯤 쉬면 될 거였다.
근데 문제는 둘이 지낼만한 방들은 옵션이 전무해 냉장고, 침대, 세탁기 등등 완전 새살림을 내야 할 지경이었다. 기본 생활이 가능한 펜션들은 전국제일의 휴가지인 만큼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땐 없던 문화이기도 하지만 한달 살기도 아니고 최소 반년살기인데 그걸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물론 돈이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표준치료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살림차릴 준비를 해야 할 지경이니 어느순간 이건 선택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뒤져보고 찾아보고 한 끝에 찾아낸 것이 암 요양병원이었다. 암환자들이 급증하는데다 점점 연령이 낮아지니 수요가 많아져 표준치료를 하거나 병원에 들어가기도 애매한 분들이 선택하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조건에서는 암환자의 특성을 고려한 식단과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할 수 있도록 병원에 픽업을 해준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가족도 일상을 살고 나도 혼자서 거뜬히 해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젊은 나이였기에 요양병원이라는 어감이 주는 거부감이 커서 남편은 마뜩찮아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代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은 내 예상과는 달리 50대와 40대가 제일 많았고 6,70대만큼 2,30대가 있었다. 20대에게 얼마나 암이 가까워졌는지, 얼마나 빨리 암에 점령당하는지 가까이 지켜보며 무척 놀랐다. 성별, 연령별, 경제력의 정도에 따라 병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그곳에서 알았고 특히 여성들이 얼마나 열악한지 보았다. 보통 남성이 큰 병에 걸리면 아내가 일을 하든 안하든 간병에 매달리거나 집에서 일과 간병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성이 발병하면 환자인 여성은 일상생활에 치료가 하나 더 얹어지는 꼴이라서 집안일도, 남편이나 가족의 식사도, 치료도, 다 여성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었다.
아직 한창 돌봄이 필요한 유아기와 학령기 아이를 둔 젊은 엄마들은 항암의 휴유증이 좀 가라앉으면 주말에 집에 가서 온갖 밀린 집안일을 하고 오느라 일요일 저녁 녹초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아내 없이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남편도 힘든 건 마찬가지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그냥 힘들고 슬픈 일이었다. 집안에 여자가 아프면 집안꼴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보이지 않게 여성의 역할이 컸는지를 반증하는 것임에도 대체로 남편들은 짜증을 냈다. 오죽하면 암투병하는 아내에게 짜증을 낼까 싶다가도 저것도 사람인가 싶은 것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집에 가서 일좀 작작 하고오라고 야단치면 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눈에 안보여야 안하지 보이는데 어떻게 모르는 체 하냐고 말이다. 그래도 그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몸에 집중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난 둘째가 한달에 한번 귀가하는 날 집에 왔는데 필요한 것만 챙겨주면 그뿐이니 신경써야 할 남편이나 아이들이 없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항암주사로 몸이 만신창이가 될 때마다 요양병원에서 제공하는 숲속 명상, 기공체조, 징 테라피 등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을 받았고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숲 산책과 호흡이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마치고 방사선 치료에 들어가기 전 한달의 휴식기에는 지리산 천왕봉에도 가볍게 오를만큼 건강한 몸이 되었다. 지금은 많이 해이해졌지만 당시 지인들은 내가 전보다 훨씬 맑아지고 눈빛이 형형해졌다고 할만큼 암은 내게 큰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지난번 의협, 의대생 반란때 <내가 만난 의사, 의사선생님>이란 글이 오마이뉴스에 실린 후 암환자들이 종종 연락해온다. 모두가 당사자가 환자인 여자분들이다. 암종류도 상태도 다르고 내가 무슨 전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으신 게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동병상련이라고 그냥 들어드리는 것뿐이다. 같은 말도 먼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이가 말하면 서운하지 않다. 물론 말을 건네는 사람은 진심이겠지만 위로랍시고 주변에서 하는 말들에 더 상처받기 쉬운 게 암환자들이다. 말기암이라서 수술도 항암도 못한다는 사람에게 암은 정복할 수 있다거나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으니 힘내라, 이따위로 말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흉기가 된다는 걸 모른다는 게 신기하다.
최근에도 두분이 연락해오셨다. 정성껏 마음을 다해 이야기 들어드리고 물어오면 조언을 드리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인생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아플 때 절절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내가 드리는 조언은 딱 세 가지다.
첫째, 수술하고 항암하기 전까지 3주의 휴식기에 어물어물 시간을 보내지 말고 가벼운 운동과 균형잡힌 식사, 휴식을 통해 최대한 면역력을 끌어올려라. 이때를 놓치면 항암내내 면역력과의 싸움에서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다. 일상은 단순하게 정리하고 스트레스 받을 일들은 주변인들에게 적극 도움을 청해 자신의 부담도 덜고 그들에게도 도와줄 기회를 줘라.
둘째, 항암이 시작되면 가능한 누워있지 말고 숲으로 가라. 걷지 못하면 누워라도 있어라. 신선한 산소가 온몸에 퍼지도록 정성을 다해 흡, 호(호흡이 아니라 흡호다)하고 내몸안에서 산소의 순환을 이미지로 연상하고 건강한 세포들을 북돋아주어라. 이미지콘트롤은 의외로 힘이 세다. 파동을 느낄 수 있는 종소리 같은 것도 집중하기에 좋다. 침대가 아니라 오직 맑고 신선한 산소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세째, 암은 내가 뭘 잘못해서 걸리는 게 아니다. 암세포 따위가 인생의 판관(判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암은 진단받는 것이지 선고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암은 앎의 기회를 주었으니 우리는 보지못하는 것을 볼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이고 그냥 재수가 없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재발, 전이되지 않았다 하여 뭘 잘해서가 아니듯 발병이든 재발 전이든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랜덤인 거다. 그냥 예약하지 않고 내게 찾아온 손님을 맞는 것일 뿐이다.
전화를 걸어오면 30분, 길게는 한 시간씩 이야기 들어드리고 간간이 당신 이야기를 귀 기울여듣고 있다 사인을 보낸다. 문자로 물어오시면 또 그것대로 정성껏 응대한다. 내가 뭐라고 어쩌다 이분들과 내가 연결될 수 있었을까 신기하고 감사해하면서 말이다. 그분들께 제일 필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위로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오늘 한분이 그동안 항암치료를 마치고 수술에 들어간다. 지난주 통화를 마칠때 힘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그녀가 항암의 남은 휴유증을 견뎌내고 수술도 의연하게 잘 버텨주기를 매일 기도했다. 또한 분은 항암치료를 거반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사람. 내가 수술하고 항암할 때 응원하고 격려해주었던, 그러나 나보다 1년 늦게 암진단을 받아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아주 가까운 언니가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있다. 온몸으로 재발, 전이되어 차마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통증에 마치 항암하던 때 심연(深淵)으로 꺼져들어가는 듯했던 그때의 몸기운이 된다. 언니가 없는 내게 언니가 되어준 사람, 자신의 재능을 미처 다 꺼내쓰지 못해 제 안에서 에너지가 승했던 사람, 언제나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 여성의 날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있다. 내가 가족 아닌 사람에게 하지못하는 언니, 소리를 유일하게 부르게 만들어준 그대. 오늘은 언니에게 이제 그만 편히 내려놓고 잘 자라고 노래해 줄게. 내게 언니는 언니 하나 뿐이었어요.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 즐거웠고 고마웠어요. 잘 가요 언니...

글 강미숙 | 소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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