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서둘러 귀가(歸家)할 채비를 하고 장익훈 회장님과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박인숙 회장님 남편의 수고에 염치(廉恥)가 없었다는 생각이듭니다
비행기에서 나도 모르게 콧물이 나더니 다시 감기가 닥쳤습니다
그간에도 3개월여를 감기로 힘이 들었는데 다시 재발이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뒤늦게 안부하려니 New Orleans에서의 3박4일 일정(日程)을 어떻게 보냈는지 가물합니다
도착 다음날 아침에 관광버스에 올랐습니다. 차멀미로 늘 앞자리를 차지했던 터라, 옆 자리에 이인숙회장님의 안내말씀을 받아 적느라고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전문 안내양으로 착가했던 실수로 결례(缺禮)를 했습니다.
W-10번 고속도르는 마치 자(尺)로 그린 직선(直線)마냥 호수를 끼고 달려간 Burden Museum을 돌아 보면서 1800년대의 각종 농기구들이 당시의 우리나라의 농기구와 비교하면서 같은 인간의 두뇌로서 이렇듯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한편 친구 하나가 "한국농기구"박물관을 하겠다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같이 Black Smith Shop(대장간-주로 백인이 근무)을 비롯한 각종 기구들이 과학적 두뇌의 산물로 보여집니다, 대형숫돌(장익훈회장님의 시술장면) 그리고 두레박등등 그리고 천정에 대형 부채(扇) 3개를 달아 놓고, 끈으로 연결하여 바람을 쏘이는 착상(着想)은 인간이 얼마나 편리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욕망이 오늘의 문명(文明)을 낳게 했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우리 일행은 차내에서 김밥으로 Lake Pontcharfrain의 ‘Causeway’ Bridge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로 긴 다리였는데 그 자리를 중국에 빼앗겼다고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이인숙회장님이 탄식했습니다. 무려 24mile의 긴 다리로 Catarina의 광폭에도 견뎌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세계 최장의 다리와는 어떻게 비교 될까요. ‘요장저우안’ 대교는 양복6차선인 반면 Causeway는 왕복 4차선이고, 총 길이가 41.58Km와 38Km로 3.58km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또 더 긴 다리가 홍콩과 마카오를 연결하는 다리가 금년에 완공된다는군요. 만리장성을 생각케 합니다.
다리를 건너서 미국의 국보급 유적지로 지정된 Lafayatte Cemetery를 차창(車窓)을 통하여 대충 보면서 Art Garden를 둘러 보았는데, 마침 한국인의 작품이 있어서 한발 늦게 돌았습니다.
셋째날 일요일 입니다
교회를 가야하는 회원을 기다렸다가 늦게 12시가 넘어서야 미국최대의 24시간 ‘나이트 라이프’라는 거리로 들어섰습니다. Bourbon St.는 남대문 시장 한가운데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것만 있다면 같은 거리라는 느낌이였습니다. 문화(文化)와 관습의 차이가 아닐까도 합니다
그리고 Royall St.에는 화가(?)들의 작품들이 한 벽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좋게는 말입니다. 어느 해였던가 가본 스페인의 'Las Rumblas' 거리를 연상케 하는 무리(無理)가 있지만 피곤이 따른 것은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가 남대문 시장 한 복판 쯤으로 보는 실예와 무지를 달래 봅니다. 게다가 또 파리의 ‘몽마르땡’까지 연상을 하니 더욱 피곤했습니다.
Jackson Square의 St.Louis 성당도 프랑스나 스페인의 성당과는 또 다른데에서 오는 아쉬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베가스 보다도 더많은 사람들이 온다는 얘기는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재헌 회장님의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위로를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번 기회에 전 세계에 하나 밖에 없다는 '뉴올리언스 국립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을 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겨우 올라가서 3-4시간을 봐야하는것을 40분정도 그냥 대충 둘러 봤습니다. 물론 저 홀로였습니다.
1939년, 내가 만 4살때 일어난 대전(大戰)이고 1945년 만 10살에 종전된 것으로 서울서 이천(利川)으로 피난까지 갔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사실 2차대전의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우리나라가 아닌가요.
나라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고, 급기야는 6.25 동족상쟁의 비극이 아직도 상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신대문제가 어디서 왔습니까. "정전협정을 평화 협정으로"를 주장하면서 백악관 앞에서 목이 터져라 시위를 해야하는 10살 해방둥이의 이 서글프고 아픈 상처를 어찌 해야 합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등에 땀이 나도록 뛰다시피 둘러 보았습니다. (아래 사진 참조)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일본을 위시한 동남아 권과 유럽을 중심으로한 두갈래의 영웅(?)들의 모습과 전투 지도가 보입니다.
2차대전과 한국의 운명에 대하여는 많이 알고 게시지만 다시 한번 상기할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찾은 곳이 '한국회관'입니다. 여행중에는 으레 그 나라의 고유 음식을 밝히던 터였지만, 그렇게 유명하다는 '포 보이스'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예약된 한국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정영로 장로님의 사모가 부른 창(唱)으로 피곤을 달래여 봤습니다. 한국인은 역시 김치가 아니면 않되는 식성을 어디를 가나 찾게 되나봅니다.
마지막으로 안내를 해 준 이인숙 회장님의 Louisiana 와 Alaska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 해 보겠습니다.
미국이 1803년에 Louisiana를 Thomas Jefferson이 교역권 협상을 위하여 갔다가 나폴레옹으로 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것을 단돈 $1500에 구입한 것인데 1평방km당 단돈 $700 인 셈입니다
Alaska의 경우를 봅시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미국무장관 윌리암 쉬워드가 $720만 (현 $16억7000만)에 샀다 한국의 4대강에 투입된 2조원보다도 쌉니다. 미의회로부터 단 한표차로 구입 허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언론으로부터도 '슈워드의 아이스박스' 혹은 '슈워드의 냉장고'라고 불렸답니다
너무 길어졌습니다.
St. LOUISE에서 다시 만납시다.
2016.4.17.
워싱톤의 신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