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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집권자와 영화 예술

글쓴이 : 타티야나 코브르… 날짜 : 2018-04-24 (화) 13:26:42

 

북한의 문화정책은 항상 집권자 개인의 기호, 특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북한의 집권자가 김씨 일가로 줄곧 이어져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는 문화 특히 영화에 대해 각기 다른 자신만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집권층의 감독, 배우들에 대한 관계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주간 ‘프로필’ 지가 살펴보았다.

 

 

북한영화사 042018.jpg
<주간 프로필 웹사이트>

 

김일성 시대

 

북한의 선전물을 보면 자주 책을 읽고 있는 김일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은 독서광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교육을 잘 받고 박식했던 스탈린과 달리 김일성은 문화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스탈린은 유명한 영화감독 도브젠코를 크레믈린으로 초청하여 영원한 것에 대해 대화를 하던 사람이었던 것에 반해 김일성은 만주 숲속의 평범한 빨치산 출신이었던 관계로 안경을 쓴 예민한 예술가들 옆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물론 유명 원로작가인 홍명희의 나이와 위상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같이 보트를 타고 그 때 같이 찍은 사진을 잡지사에 보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빨치산 출신의 동료들만 좋아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를 후원한 소련의 위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중 서적과 영화의 선전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집권 후 곧바로 북한은 새로운 인민문화를 창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텔리를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고 부른 스탈린을(원래 작가인 유리 올레샤가 한 말을 스탈린이 차용) 본받아 인텔리는 “문화전선의 투사”라고 불렀다. 이 말 하나 만으로도 문화의 역할이 창작일 뿐 아니라 좋은 교육, 훈련 수단임을 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7년 모든 북한의 지식인들은 직업 동맹으로 통합되었는데, 북한 공산당은 이 직업 동맹을 통해 북한 국내의 스크린과 책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을 통제(統制)하고자 했다. 영화감독, 작가, 배우들이 이렇게 확연한 실제적인 공산당의 기대를 밀쳐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반대로 이 직업동맹에서 국가가 그들의 일에 대해 칭찬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북한의 인텔리들은 주로 좌파 사상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 전의 빨치산 활동이나 소련의 영향에 대해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런 계열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은 남쪽인 한국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도 인텔리들의 마음에 들었다. 항일 영웅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에 뺨에는 매력적인 보조개가 있는 젊은 군인이니 그들이 보기에 당시 남한의 지도자였던 미국의 졸개인 부패 덩어리 이승만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광복 후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김일성의 인민 계몽을 도와주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월북(越北)했던 것이다.

 

1949년 처음으로 나온 북한 영화 ‘내 고향’에는 모든 재능이 꽃피었고 북한 영화인들은 큰 열정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가깝게 느낄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과부의 가족이 빚 때문에 지주 집안이 노예가 되고, 맏아들은 감옥에 갇히는데, 그는 거기서 탈옥하여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고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은 해방군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한다. 영화는 매우 역동적이고 호소력 있게 제작되었고, 에이젠쉬타인의 ’파업‘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운명에 순응하던, 억압된 여성이 아들의 영향을 받아 의식이 깨어나는 점에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역을 맡은 여배우 유경애는 심지어 외모까지도 1926년 나온 어머니라는 영화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은 베라 바라놉스카야와 흡사했다.

 

내 고향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전문 잡지들에서 영화에 대한 호평이 쏟아져 나왔으며, 기쁨에 겨운 배우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촬영 전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숲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법도 몰랐는데 이전에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자문을 해 주었다고 일화를 소개하고 이 빨치산들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이런 영화에 대한 호평과 여러 논의 중에서 김일성은 거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옆쪽으로 제쳐졌다. 스스로를 위대한 수령으로 부르던 김일성은 이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모종의 결론을 내렸다.

 

다음에 나온 영화들은 제작도, 이에 대한 논평도 다르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나리오에서 확실한 특징과 개성이 두드러지는 주인공들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 주인공들의 말은 점점 더 정치적인 연설과 비슷해지고, 반드시 그 주인공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대상을(쉽게 짐작되겠지만, 이것은 물론 부모가 아닌 위대한 수령 동지이다) 언급하기 시작했다. 출연 배우들의 이름을 보여주는 자막이 사라졌다. 누가 어떤 역할을 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관객이 그 이름을 다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제작자들의 개인적인 염려나 힘들었던 점에 관한 인터뷰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이 대중 앞에서 하는 말의 모든 결론은 김일성에게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김일성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특히 ‘방탕’을 용인하지 못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방탕을 용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인공들 사이에 어떤 로맨스를 암시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영화에서 육체관계나 남녀의 정염이 사라지게 되었다. 여배우들은 점점 미모가 덜한 사람들로 대체되었고 남자들도 확연히 시선을 끄는 미남은 없게 되었다. 코미디언들은 함부로 유머를 말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영화 평가는 특수 당원 비평가들이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단 하나의 상부에서 허가해준 견해만을 말했다. 영화 평이 나쁘면 이것은 형벌을 선고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런 경우 다음과 같이 정말 무시무시한 언어로 선고가 내려졌다. 배우/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은 적에 대한 분노나 사회주의적 건설의 기쁨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까? 주인공들이 개인적인 관계에 너무 몰입했다는 말이지? 이것은 모두 그들이 반당분자, 게으름뱅이에 퇴폐적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해방 전에 일본에서 공부한 더러운 뱀 같은 기회주의자 아닐까? 이런 나쁜 놈들! 여기서 희생이 된 사람들은 모욕적인 공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평양에서 아주 먼 오지로 보내져 벌목장이나,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내 고향’에서 주인공의 약혼자 역할을 연기했던 섬섬옥수 미인 여배우 문예봉도 그런 운명에 처해졌다.

 

1950-1960년대는 처음에 새로운 정권을 열렬히 기쁨으로 환영하던 문화계 인사들의 희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기간이었다. 북한에 자기 개인의 독재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만주 빨치산 출신 지도자에게는 이런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유연성이 없었다. 그 보다는 모든 수단을 써서 이들을 위협하고 그들이 교묘한 선동을 할 수 있는 싹을 뿌리 뽑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그런데 이런 열성적인 인텔리 중 그 누구도 그가 두려워하던 교묘한 선전 선동을 하려고 생각조차 한 사람이 없었다.

 

김정일 시대

 

김일성은 오래 전에 이미 김정일을 후계자로 선택했고 1960년대 말부터 국가 통치를 실제로 실습하도록 앞세웠다. 김정일이 단독으로 관할하게 된 것은 선전 및 문화 분야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이 분야야 말로 김정일이 가장 흥미를 느끼던 분야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갖고 있던 카리스마를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원래부터 그렇게 공적인 자리를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북한의 지도자가 아니라 영화감독 또는 프로듀서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가 열정을 기울인 분야였다. 김정일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촬영장에서 살았다. 직접 시나리오를 읽고 배우들을 선발하고, 검열관들의 희망 사항을 파헤치기도 했다. 영화 ‘꽃 파는 처녀’ 촬영 시 김정일은 영화감독에게 시골의 고아인 여주인공에게 색동옷을 입히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조언했다. 시골 고아에게 그런 화려한 옷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영화 내내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나온다. 그래서 좀 심심하기는 하지만 그 대신 사실적이다. 김정일은 개인적으로 배우들에게 옛날 짚신을 신는 법을 가르쳤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는 젊은 배우들이 늘 짚신의 뒤와 앞을 구별 못하여 뒤가 앞으로 오게 신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정일은 정치적인 수완을 굳게 믿었던 아버지가 준 정치적 패러다임의 틀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이 틀을 확장시키고자 했고 북한의 공식적인 문화를 좀 더 인간적인 것이 되게 하고자 노력했다. 김정은은 몸에 좋은 약이 항상 써야 되는 것은 아니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하려면 영화나 책을 최대한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김정은의 시대에 북한 영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던 코미디, 로맨스 영화, 가족 드라마, 역사 드라마들이 출현하고 민담이 영화화되었다. 영화에 서정적인 아름다운 노래들이 등장하고, 이 노래들은 영화관을 나간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들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새로운 영화들은 미남, 미녀들을 배우로 선발했다. 이 배우들의 대부분은 몸무게가 너무 나가서 한국이나 할리우드에서는 캐스팅될 수 없었을 것이지만(북한에서는 마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인도영화처럼 부드럽고 조화로운 얼굴과 몸매를 더 선호한다) 일반 관객의 눈으로 보면 이 배우들은 매우 매력이 있다. 나는 북한 영화를 한국 대학교 강의실에서 상영한 바 있는데, 북한 영화의 미녀들이 취향이 까다로운 서울 대학생들의 마음에도 든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한 바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외국 영화들을 소장하고 있던 김정은은 북한 영화제작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우수 외국 영화들을 관람하도록 했다. 김정일이 통치하던 시대, 정치적 구호 중의 하나는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것이었다.

 

전반적인 인간화는 영화와 서적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영화와 서적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에게도 일어났다. 조금씩,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하게 투옥되거나 유형을 갔던 사람들이 자기 자리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11년간 러시아계 한국인인 아내와 함께 지하 감옥 생활을 했던 김철이 지하 감옥에서 풀려나서 돌아오고 그의 시가 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영화계에는 문예봉이 돌아왔다. 돌아온 문예봉은 이제는 청춘이 아니었고 그녀처럼 귀족적으로 얄상한 스타일도 더 이상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단역들이 주어졌다. 한 번은 투옥을 당했던 여배우의 불명예스러운 지위가 조심스러워 전체 같이 단체 사진을 찍는데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김정일은 이를 알고 문예봉에게 전화해서 둘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초청했다.


봄날의 눈석이 1985.jpg

북한의 대중영화 '봄날의 눈석이' (1985)

 

물론 북한 영화의 자유화에는 자체적인 정치적 한계가 있었다. 80년대 말-90년대 초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 연방 전체의 붕괴로 이어진 것을 알게 된 김정일은 북한 문화계가 이 방향으로 너무나 과감하게 나가는 것을 중지시켰다. 90년대 영화에는 김정은 우상 숭배 선전이 강화되고 사회적인 비판은 어떤 것이던 중지되었다. 북한에서는 모든 부정적인 캐릭터가 사라지고, 이제부터는 모든 부랑자들, 건달들은 외국에만 살고 있으며, 북한은 이성과 사회적인 조화가 있는, 세계 속의 유일한 섬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북한 영화는 가장 치가 떨리는 선전선동을 기분 좋은 미적 형태를 갖추도록 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직접 현지에서 창조하기도 했고, 부끄러움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외국의 영화에서 어디서든 필요하면 차용하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 인도 드라마, 할리우드나 홍콩의 액션 영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영화..., 이 모든 것들을 재음미하고 재해석하여 북한식으로 개작하여,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국가의 관객들을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사용했다.

    

김정은 시대

 

김정일의 집권기에 영화계 인사들은 김정일 한 사람의 절대적인 관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이 김정은에게 요청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김정은에게 전화 한 번만 하면 해결되곤 했다. 90년대 말 ‘내 고향’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했었던, 이제는 노령이 된 유원준이 역사물 시리즈인 ‘민족과 운명’에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즉시 김정일에게 이를 호소했다. 결과적으로 노인이 된 그의 얼굴의 검버섯들과 바싹 마른 손이 광부(鑛夫)의 헬멧과 망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원하던 영웅적인 광부 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들은 새롭게 집권한 김정은에게서 김정일과 동일한 관심과 아버지와 같은 배려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하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김정은은 그들을 줄 세워서 탄광이나 벌목장으로 보내지도 않았다. 그냥 김정은 자체가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특히 북한 영화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김정은은 영화보다는 스포츠와 대중음악, 학령전 교육에 더 관심이 많았고 좋아했다. 또한 가정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던 김정일, 김일성과 달리, 김정은은 아직 어린 두 딸의 모범적인 아버지이고, 현재는 무엇보다도 유아 교육물들에 가장 관심이 많다. 그리고 딸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아버지인 김정은의 관심도 점차로 학교 교육으로 옮겨가고 있다.

 

현재 북한의 문화정책 전체는 바로 이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혁신적인 유치원과 학교, “모란봉”극단, 축구 선수들과 복싱 선수들, 마식령 스키장이 언론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고, 영화는 그늘 속에 감추어져서, 김정일 시대에 타고 올라왔던 궤도를 이제를 뒷걸음질 쳐 하락하고 있는 국면이다. 영화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갈수록 더 중국드라마와 비슷해지는 새로운 재미있는 연속극들이 제작되고 있으며, 신인 배우들도 등장하고 있다. 영화제작자들은 ‘오래 기다린 아버지’, ‘꿈꾸던 사명’ 등, 영재 아동과 훌륭한 유아교육 교사들에 관한 영화들을 제작하고 예전처럼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김정일 시대처럼 최우선적인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집권이후 김정은은 기껏해야 두어 번 국립 영화제작소를 방문했을 뿐이고, 방문해서도 “세계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상한 연설을 해서 영화제작자들을 초토화(焦土化) 시켰다. 세계화가 무엇인가는 설명도 하지 않았고, 영화제작자들이 스스로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라고 제안했다. 대중음악 같은, 다른 문화 분야의 발전 방향을 기초로 생각해보면, 김정은이 말하는 세계화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자유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통제도 여전하고 모란봉 악단이 점점 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관중의 흥미를 유발시켜도, 그들이 부르는 노래 내용은 여전히 완전히 주체사상 일색이다.

 

필자와 인터뷰를 한 북한 영화 스타 여배우는 인터뷰가 끝난 후 “그럼 도대체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우리 북한 영화가 세계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 필자는 그 여배우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북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이슬람교 건축물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 벽에 새겨진 코란 구절은 무시하면서, 이슬람 군주들의 묘(墓)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 세계 대부분의 관객은 필자와는 다르다. 그들은 북한 영화를 보면서 북한 영화 전체에 가득한, 위대한 수령에 대한 종교와 같은 믿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관객들에게 북한 영화에 나오는 수령 찬양은 정말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종교에 불과하다. 그래서 북한 영화는 세계화될 수 없고 그냥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그칠 것이라 우려된다. 북한 여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글 타티야나 고브루센코 고려대 교수 | 위클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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