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전략을 바꿔 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가 아닌 주 의회 정치인들을 공략해 동해 병기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버지니아주는 주 차원에서 교과서를 채택하기 때문에 교육위원회보다는 주 의회에서 동해 병기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메릴랜드주는 각 지역 교육청별로 새로운 교과서를 채택하므로 역사적 진실에 관심이 있는 교육 관계자들을 공략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으로 보였다. 이를 감안해 ‘미주 한인의 목소리’가 최초에 수립한 사업 계획서의 일부 전략과 행동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갈길은 멀고 언제, 어디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암흑같은 어두움을 헤치듯 불안한 마음이지만 필자와 임원들은 동해 병기 캠페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앞만 보고 전진 해 나가기로 했다.
2012년 3월 백악관 청원 운동을 전개할 때 일본 우익 세력의 방해 공작이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떠올렸다. 또한 앞서 그 해 1월 버지니아 주 의회에서 동해 병기 법안이 좌절(挫折)됐던 것도 생각해봤다. 메릴랜드주 교육 관계자들을 설득해 교과서를 수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교과서 채택 위원들은 외부의 로비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지역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선출된 교육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로비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비교적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버지니아 주 의회에 동해 병기 법안이 상정될 경우 일본의 치열하고 거대한 방해 공작이 불을 보듯 예상됐다.
우선은 메릴랜드주 각 지역 교육청을 먼저 공략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면 일본 정부와 일본 우익 세력의 시선이 메릴랜드주로 향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본정부와 우익 세력이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버지니아주에서 은밀하게 정치인들과 접촉해 약속을 받아낸다면 한번 해볼만 할 것 같았다. 바로 연막작전이었다. 매우 단순한 전략이지만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릴랜드주에서 요란스럽게 시민운동을 전개해 일본 정부를 자극시키는 한편 버지니아주에서는 모든 만반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조용하게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메릴랜드주 동해 병기 캠페인:
필자는 메릴랜드주 교육부의 사회학 전문가인 말시 토마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청했다. 말시는 필자에게 미국의 출판사들이 교과서를 만들 때 지도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도 제작사가 이미 만들어 놓은 지도를 가져다 쓰고 있음을 알려줬다. 또한 출판사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지도들은 ‘나이스트롬’ 이라는 대규모 지도 제작사가 만든 것이라는 것도 귀띔해줬다. 그러니 출판사들을 공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스트롬이라는 지도 제작사를 먼저 공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말시는 200여개 출판사 명단과 연락처도 필자에게 제공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우선 ‘나이스트롬’에 모든 지도에 동해를 병기해줄 것을 요구하는 자료를 49개 워싱턴 지역 한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송했다. 만약 동해 병기를 하지 않으면 ‘나이스트롬’ 사의 지도 불매 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간접적인 엄포도 잊지 않았다. 우선 순위로 나이스트롬 지도 제작사를 집중 공략한 후 다른 출판사에도 일일이 연락을 취해 동해 병기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말시는 또한 필자에게 카운티 교육청을 공략해 동해 병기에 대한 교사 지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자문을 해주었다. 그래야만 교실에서 교사들이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동해’와 ‘일본해’를 동시에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말시는 “우선 메릴랜드주에서 가장 큰 5개 카운티 교육청을 공략해서 성공하면 나머지 19개 카운티와 볼티모어시는 이를 따라서 동해 병기 교사 지침서를 하달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시는 우선 한인들이 밀집 거주하고, 메릴랜드주에서 가장 융통성이 있는 하워드카운티 교육청을 공략한 후 뒤를 이어 앤아룬델, 프린스 조지스, 몽고메리, 볼티모어 교육청을 공략해보라는 매우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었다.
필자는 우선 하워드 카운티 교육청에 공문을 보냈다. 워싱턴 지역 49개 한인 단체의 이름으로 교과서 동해 병기를 요구하는 공문과 타당성 자료를 첨부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여러번의 전화시도 끝에 사회학 책임자와 장시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상세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사회학 책임자에게 동해 이슈에 대한 회의를 하자고 제시했다. 필자가 직접 교육청에 찾아가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교과서에 동해 병기를 해야하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교육청 여러 관계자들이 동해 이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검토를 마친 후 회의 날짜를 정하자는 답변을 했다.
초조하게 기다림을 이어가던 필자는 3주 후 다시 전화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검토가 다 끝났으니 만나서 논의하자며 회의 일시를 잡아주었다. 필자와 은정기 상임위원장은 약속 날짜에 맞춰 동해 병기 타당성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하워드카운티 교육청의 사회학 관련 관계자들을 만나러 갔다. 회의에는 초,중등부 사회학 책임자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왜 하워드카운티 교육청이 교과서를 수정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했다.
발표를 들은 관계자들은 한인사회의 요구에 공감하고 동의를 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필자는 우선 각 학교 교장과 교사들에게 수업 시간에 ‘동해’와 ‘일본해’를 함께 가르치라는 교사 지침서를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관계자 대부분이 공감하는 표정으로 교육청 내부 회의와 검토를 통해 부교육감의 승인을 받아 각 학교에 동해 병기 지침서를 내리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날 회의 이후 필자는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 카운티 교육청 내부회의 결과를 확인해 나갔다. 하지만 연락할 때마다 매번 ‘아직 검토중’이라는 답변만 해오니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2013 년 7월 25 일. 동해 병기 교사 지침서를 내리게 됐다는 연락을 사회학 책임자로부터 받았다. 동해 교사 지침서 초안을 필자에게 보내주며 내용을 검토하고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의견을 달라고 했다. 초안을 읽어보니 수정할 내용도 없고 만족스러워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드디어 부교육감의 승인 절차만 남은 것이다. 매우 긴장 되는 순간이었다. 2012년 3월 백악관 청원운동으로 시작해서 그동안 많은 절망과 실패를 맛보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드디어 동해 병기 캠페인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물을 처음으로 얻을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앤아룬델카운티 교육청에 연락해서 하워드카운티로부터 받은 교사 지침서 초안을 보냈다. 그리고 하워드카운티 교육청에서는 이미 교사 지침서를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왜 앤아룬델카운티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결정도 못하고 계속 검토만 하고 있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했다. 그러자 며칠 후 그토록 바라던 연락이 왔다. 앤아룬델카운티에서도 교사 지침서를 내리겠다는 답이었다. 또 며칠 후에는 아예 부교육감이 이를 승인, 이미 각 학교 교장 과 교사들에게 지침서를 하달했다는 연락이 왔다.
필자와 임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메릴랜드주의 수도 애나폴리스가 위치한 앤아룬델카운티가 하워드카운티보다 선수를 친 것이다. 어차피 동해 병기 교사 지침서를 내려야만 하는 상황으로 판단한 앤아룬델카운티 교육청이 자기네 카운티가 메릴랜드에서 이를 최초로 시행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였다.
필자와 임원들은 즉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워싱턴 지역 기자들은 물론이고 워싱턴 특파원들까지 모두 초청해 그동안 미주 한인들이 추진해온 동해 병기 캠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고 발표했다. 앤아룬델카운티 교육청에서 동해를 가르치기 위한 교사 지침서를 각 학교 교장과 교사들에게 하달했다는 사실은 미주 한인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야말로 반가운 뉴스였다. 당연히 미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 사실이 널리 보도가 됐다. 필자와 임원들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이 보도 후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일본 정부에 항의를 한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메릴랜드주 앤아룬델 카운티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카운티 정부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가 더 무섭지 외국정부의 항의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카운티내의 교육 문제는 더 그랬기에 일본의 항의를 내정 간섭으로 받아들이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