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님의 마지막 편지
-----그의 부모님 형제들과 친우 친지들과 초재를 올리고 근무지로 돌아와 내 방문을 여니 편지 하나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92부대 8중대 병장 현승효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겉봉에는 <1977년 6월 30일>자 우체국 소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29일 오후 4시 쯤 쓰러져 30일 새벽 1시에 다시는 못 올 길로 갔다 하던데 언제 또 이 편지를 썼을까요. 미칠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노야에게 (군사편지)
그동안 건강하리라 믿고 있고 하던 운동과 하루 일과도
여전히 충실히 하리라 믿소. 나도 건강하며 하루하루
즐겁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오.
전번에 보낸 소식은 받았으리라 아오.
이곳은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고 하늘에는 비 올 징조조차
보이지 않아 농부들의 걱정이 대단한 것 같소.
지내놓고 생각하니 당신은 무척이나 억세고 강한 사람이
틀림없소. 학교 일이 어렵고 짜증스럽고 그리고 나까지도
이렇게 떨어져서 애를 먹이는데도 한 번도 진짜로 힘들어
하지 않고 묵묵히 모든 일을 처리해 오고 있으니 말이요.
다시 만나는 날까지 굳세게 이겨 나기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오.
그리고 잘 해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소식 주시오.
그럼 안녕, 또 소식 전하리다
효.
거짓말같은 일을 당한 후, 위로하는 말도 듣기 싫고 가만히 쳐다보며 안쓰러워하는 눈길도 다 싫었습니다.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이 덮치면 고스란히 받으며 기뻐했습니다. 그의 색신은 만질 수 없는 현세에서 홀로 남은 내게 유일한 행복이란 그가 남긴 일기문을 읽고 또 읽으며 울부짖는 일과
책을 하나 남긴다며 써 나가던 것, 생각이 잘 안 풀릴 때는 답답하여 자신의 몸을 찢고 싶도록 괴롭다가 생각이 풀리면 희열에 몸을 떨며 썼다던 글, 글자가 깨알같아 참으로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옮겨 적는 노동이었습니다.
마침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날이 정해졌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1977년 8월 중순, 찌는 듯한 그 여름 동작동 국립묘지 합동분향소.
전쟁도 안 났는데 웬 군인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요.
수백명의 사람들이 절규하고 몸부림치며 애통해 하는 모습. 건져주 살려주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는 중생들,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저 피맺힌 소리
함께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 이를 악물고 울기를 멈추었습니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먼 과거의 일같고 아니 전생의 일, 저 먼 데 아스라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 같이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주위를 돌아 보았습니다.
(1977년 8월, 노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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