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가능성의 실현인 실재성과 연관해서만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독립적 가능성이라는 것은 우리와 무관하며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참된 나, 진아, 가능성으로서의 나는 항상 유성의 찰나적 빛남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날 뿐이다.
현존하는 인간은 진아와 단절된 존재이며 고향과의 합일에서 분리된 존재이고 우주의 미아일 뿐이다. 가능성 그 자체는 초월적인 것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초월적인 것은 가능적 경험을 전적으로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 반면에 가능성은 경험적 실재성 속에서 확인된다.
가능성을 실현 결과에서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현존재적 자아의 전제인 가능성으로서의 자아, 곧 진아의 모습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성과 실재성의 불일치는 우리가 논리적으로 추리해낼 수 있는 범우주적 불일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 가능성과 실재성의 문제는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인간적 특수 경로로 전환할 때 인간적 사실이 된다.
이때 인간이 직면하는 불일치는 통일체인 인간의 내적 불일치, 즉 육체와 영혼, 실제 인식과 인식 능력의 불일치와, 상황적 불일치, 즉 자아와 비아 및 자아와 타 자아의 불일치다. 현존재는 모두 가능성과 실재성의 양면성을 지니는 불일치의 존재다.
존재하는 것은 불일치 속에 있다. 따라서 존재는 변동한다. 자연계에서 그 양식은 반복과 순환을 이룬다. 이러한 운동양식의 종결과 해소는 영성, 즉 예지적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불일치 속에 있는 정신적 존재는 이러한 불일치의 해소를 통해 일치로, 양자의 이중성이 가지는 발전적 지양을 통해 통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로써 정신적 존재는 회향적 존재가 된다. 무로부터는 어떠한 것도 생길 수 없고, 원인은 결과와 동등하거나 우세한 실재성을 가져야 하므로 가능성은 결코 무일 수 없다. 가능성은 오직 실재성 속에서만 유로 확인된다. 실재성과 독립된 가능성은 미지수이므로 그 유무를 단정할 수 없다.
가능성은 ‘유이자 무’다. 가능성 그 자체는 선천적인 것이므로 경험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험적 실재성과 분리된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는 사유를 진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의 가능성이란 유로서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직 실재성에서만 고찰한다면 우리는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가능성은 실재성보다 늘 우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현실적 실재성에 대해서 가능성이 완전히 등가를 이룰 뿐이라면 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발전을 이룰 수 없을 터인데,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한 한 현실적인 것은 계속 전진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영역은 현존재인 우리에게는 닫혀 있다. 단지 경험적 실재성이라는 틈을 통하여 조금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다. 현존재인 우리는 가능성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존재적인 내가 진아에 대해 닫혀 있는 상실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 근원적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능성 그 자체는 ‘~을 할 수 있다’는 그 본질 속에 실현 목적으로 서의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 실현 가능한 것은 최상의 독자적인 것이고 존엄한 것이며 최고의 자유다. 자유는 가능성 속에만 있다. 실재성은 가능성과의 연관 속에서만 전체적으로 파악된다. 가능성과 실재성의 이러한 관계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학적 문제의 기본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아직 가능성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반대 인자인 실재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은 우리의 참모습, 진아를 뜻할 수 있다. 진아는 바로 실재화 되지 않은 자유의 근본 실체이고 그것의 실현과정이 자아의 모습이다. 가능성으로서의 진아의 본질은 자유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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