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운동의 최고형태인 투쟁을 수행하는 존재인 한 그가 목적하는 것은 더 이상의 불일치를 남기지 않고 종결되는 일치다. 이러한 투쟁, 즉 일치⟶불일치⟶일치로 이어지는 A⟶B⟶A’ 의 경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발전적인 것이다. 앞의 일치(A)는 양자투쟁 관계인 불일치로 전환할 일치이지만 뒤의 일치(A’)는 전개에 의하여 모든 상충적인 것을 해결한 완전 상태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러한 전 과정 속에 있으며, B 로서의 자아, 즉 현존하는 우리는 회향적 존재다.
인간의 투쟁이 불일치를 해소하고 완전한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 투쟁의 과정 속에 있는 현존재적 인간은 그 귀결인 완전 상태의 일치에 대해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불일치 상태에 있는 자아는 그 완전성인 일치에 대해 결여로서 현존한다. 그는 완전성에 대해 유한하며 한정성을 지닌 존재다. 그가 갈망하는 완전한 일치의 모습은 무한하며 비한정적이다. 동시에 또 불일치가 상충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한, 불일치의 발전적 해소인 일치는 이러한 상충관계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것은 탈관계로서의 통일로 상정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인 동시에 인간화된 것을 우리는 유일신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형성의 과정이 신학의 역사를 설명한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로 신화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책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제신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록 그 신들이 힘을 합치더라도 예수를 끌어내리지 못하겠지만, 독자성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능가하며, 예수는 이들을 통해 보완되고 있다. 그러나 올림포스에서는 아직 불일치가 완전히 극복되지 않으며, 그것이 불일치를 잉태하고 있는 한, 그리스 신화는 또 다른 단계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신의 최고봉으로서 유대의 신, 즉 전지전능하며 유일한 신, 여호와의 승리로 나타난다. 그리스인은 유대인에 비해 더 현실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현존재적 존재일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회향적 존재이기도 하므 로 그리스인에 대한 유대인의 종교적 승리는 필연적이다. 신은 회향을 소망하는 존재, 인간이 상실한 고향의 한 구체화된 모습인데, 어떻게 우리가 신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으로 넘어 간 자들은 또 다른 신의 대용물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이 형성하는 그 모습도 인류가 만들어낸 신과 대동소이하다.
우리는 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신이 절대적 창조주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 자체는 회향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만 신을 멀리서 경원하는 고향으로 볼 뿐이다. 유일신이 무관계 속의 존재이지만 인간은 본래 복수적으로 태어났고 이 관계는 통일 속에서 해소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진정한 모습의 인간을 바랄 뿐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속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여하히 이 과정을 완결하느냐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현존하는 인간, 현실적 자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 자아는 회향의 과정 중에 살고 있는 불일치의 과정적 존재이며, 결여되고 유한한 존재로서 점진적으로 일치의 완전성으로 전진하는 자다. 그는 자신의 유한적 한계를 무한으로 확대⋅확산코자 기도하고 동시에 개체로서 자신의 원리를 통일 속에서 무산시키려는 존재로, 능동적으로 도구적 수단을 활용한다. 여기서 인식과 자유의지가 문제가 된다.
동시에 그는 생래적으로 또 다른 하나의 장치를 가지는데, 그것은 감응과 반응체인 감정이다. 개개의 다양성과 구체성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위대한 각성은 각각 구체적 내용과 개별적 다양성을 띠더라도 궁극적으로 일치 를 향한 투쟁의 원리를 반영한다. 이 투쟁의 원리를 비인간적으로 대상화하면 그것은 섭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투쟁은 여하한 대상에 관해서도 일치를 향한 전진 경향을 가진다.
그런데 이 원리를 반영하는 구체적 개별성 가운데 최고의 순수한 형태는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원리야말로 일치를 향한 인간의 투쟁에 관한 것이므로 투쟁의 구체적 대상이 인간 자체가 될 때, 투쟁의 대상과 투쟁의 주체는 불가분리한 일자이며, 대상과 주체의 일치는 일치의 최고 순수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치→불일치→일치’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투쟁의 최고 형태는 인간 자력에 의존한 인간 상생의 교감과 합치의 추구다. 즉 범아의 추구다. 종국의 일치는 곧 투쟁의 궁극적 귀결을 의미하며, 그 최고의 순수한 구체적 모습은 범아의 완성이다. 이때 일체의 인간적 대립과 상쟁은 소멸할 것이다.
자투와 회향
현존재적 자아는 생래적 반응체인 감정과 능동적 도전체인 인식 및 자유의지라는 두개의 경로로 길고도 험한 회향 길을 헤쳐 간다. 여기서 인식과 자유의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연쇄를 이룬다. 의지의 결정에는 언제나 인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며, 동시에 자유의지의 전 단계에 있는 인식은 어떤 힘, 즉 능동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관념을 수용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의 관념을 산출하고 실현하는 그 어떤 종류의 능동적인 능력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경우에 한정될 것이다. 이러한 능동적 능력을 수동적 반응력인 감정과 구별하여 자투라고 부르자. 인식은 자투의 전면에, 자유의지는 자투의 이면에 속하는 것으로서, 양자의 차이는 인식이 ‘유한’한 지각 범위에 멈추는 데에 반해 자유의지는 무한을 지향한다는 데에 있다.
이성적 존재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추구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은 다양한 감성적 직관을 오성의 형식으로 통일한다. 이 인식은 개념으로 구성되며, 개념은 경험적 개념이든 순수개념이든 제약된 개별 존재다. 제약의 근거인 인간이성은 필연적으로 무제약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무제약적 이념은 다시 그 근거로서 무제약의 무제약성인 이상을 전제한다. 이와 같이 이성적 존재는 그 완전한 통일에 도달할 때까지 사고를 멈추지 않고 만족하지도 못한다. 이 통일 지향의 원리를 칸트는 통정적(統整的) 원리라 부르고 그것을 이성의 사실로 간주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통정적 원리는 현상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이 통정적 원리를 촉진하고, 형이상학과 종교 그리고 예술 같은 인류의 전 문화영역에 걸친 작업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구명하지 못하고 단지 현실적 사실 확인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추구하고 수행하는 모든 작업의 원동력이 회향의 의지임을 인식해야 한다. 회향의 다양성 속에 주어지는 것이 통정적 철학⋅종교⋅예술이다. 이것을 위해 발동된 것이 자유의지이며 자유의지의 실현과정이 통정성인 것이다. 칸트는 예지계에 속하는 자유의지가 어떻게 가능한 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직선적 사고의 결과다. 회향은 우리가 형이상학⋅종교⋅예술을 고찰할 때 어디서나 살아 움직이는 실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회향의 의지는 인간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측면에서 그 이상의 원인성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인식의 근원적 전제인 일자(一者)는 운동 또는 투쟁이 종식된 통일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부족이 없이 오직 자신의 원리에 자족하는 자유의 모습인데, 이를 자존자(自存者), 또는 주객 통일체로서의 진아(眞我)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존자를 전제로 인식이 가능하다면, 자존자에 대한 의식, 곧 자존의식은 인식의 가능태로서 자투의 속성을 가진다. 이때 자투를 가능케 한 자존의식의 원인이 된 것은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식을 가능케 한 것이 자투라는 동적 행위이지만, 이 자투에서야말로 인식의 선험적 조건인 시간과 공간의 실체가 명확히 이해된다. 칸트가 시공을 물 자체로서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고찰한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자투의 논리에 의해서만 선험적 조건인 시공의 모습이 완전히 베일을 벗는다. 자투가 인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선험적이며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또한 자투는 자아와 비아의 대응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자아의 인식 가능성이기 때문에 물 자체가 아니라 상관관계의 관념이다.
자존자가 일체의 투쟁이 없는 통일장의 영역이라면 그것은 일체의 의존에서 독립한 자아의 원리를 원인으로 하는 것, 즉 자유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자아에 비아인 존재가 대응한다면 자아는 자유의 원리에 따라 이 비아를 제약하지 않을 수없다. 여기서 자투가 도입되며,이 자투에의해 비아는 의존적 존재가 된다. 이 의존적 존재는 제약된 개별 존재로 실재하며, 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는 인식 대상이 된다. 이런 논리 전개 방식은 순환논리이지만, 전제를 결과에 도입하고 결과를 전제에 차입하는 모순적 순환논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추상적 전제가 구체적 결과에서 유도되고 구체적 결과는 추상적 전제에 의존해 있으나, 명확한 객관적 실재성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져 있어서 하등의 모순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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