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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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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9)

가능성과 완전성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4-15 (토) 17:20:46

가능성과 완전성

 

가능성과 완전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유이자 무. 가능성은 비실재적 유이자 무이지만 완전성은 실재적 유이자무. 실재성은 그 궁극적 상태인 완전성의 차원에서 가능성과 동등하다. 그러나 실재성이 늘 전진하고 증대되어 가는 불완전성 속에 있을 때, 이 실재성에 대해서는 그 전제인 가능성이 우세하다. 불완전성은 오직 실재성의 문제일 뿐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무한한 완전성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 실재적 완전성에서는 가능성이 완전히 실재성으로 전환하므로 소멸한다. ‘유이 자 무의 부정은 유 또는 무.

 

현존재의 모습은 유 또는 무의 양자택일적이다. 유와 무는 우선 유와 무로 분리되지만, 유로서 의 자아는 무와 접함으로써 자아를 실향자로 알 뿐 아니라 회향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무는 자아와 실제의 유인 존재 자체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가능성이 무일 때, 가능성은 완전성으로 귀결되며, 가능성이 유일 때 실재성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상태로 있다. 현실 속의 상황적 는 단지 불완전하고 타자에 의존하는 자이며, 한층 큰 것, 한층 선한 것을 끝없이 구하여 마지않는 자다. 내가 의존하고 기대하는 존재는 가능성

차원에서 모든 것을 무제한으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무제한으로 자기 안에 포함하는 존재다.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존재를 신이라고 보는데, 신은 가능성이 실재성으로 실현된 결과다. 이때는 원인으로서의 가능성이 실재적 존재로 전환되어 있으므로 원인은 결과와 동일한 것으로 완전히 통일되며, 그 자체가 자유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완전성과 관련해서는 전지전능하고 영원하며 무한한 창조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과 비교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가능성이 무로 된다는 것은 실재성이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는 존재를 떠나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존재와 그 원인으로서의 무한한 신은 공히 있다는 존재 개념에서 동등하다. 무한은 유한의 궁극적 연장으로서 존재를 떠날 수 없다. 완전성의 존재에서는 가능성이 무화된다. 신은 존재하는 신, 살아 움직이는 신이지만, 가능성은 존재 이전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의 완전한 실현인 신은 가능성과 실재성의 분리 불가능한 존재이며, 가능성의 궁극적인 상태에서 실재하는 존재다. 존재 속에서 그 궁극적 연장으로서 정립된 무한자인 신을, 유한한 인간인 나는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혹은 신 안에는 내가 파악하기는 커녕 사유를 통해 도달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 무수하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우리가 무이면서 유로서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데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무한자로서의 신은 일체의 유한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한 역시 가능성 자체 속에 내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계의 시공간적 유한 속에 있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세계 속에 무한을 정립하려 하고 그것을 추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세계가 시공간상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똑같이 세계가 유한하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세계의 내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경험할 때 현상을 파악하는 인식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가 무한하다 또는 유한하다고 하는 두 명제가 다 경험 속에는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명제와 관련해 인간 자체의 존재는 어느 명제와도 무관하며, 무한한 것과도 유한한 것과도 전적으로 다른 어떤 존재다. 유한과 무한의 역설은 존재의 운동성이 지니는 역설이다. 우리 존재는 불일치 자체인 투쟁이다. 이 투쟁이야말로 우리의 존재가 유한 및 무한과 무관한 자유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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