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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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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13)

현존재의 위상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6-06 (화) 20:40:51

현존재의 위상

 

 

일치불일치일치라는 도식이 표현하는 회향의 구도는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의 문제다. 그것은 반자연적 운동으로서 오직 자유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회향은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일치를 향한 과정은 실존의 문제가 된다. 운동의 도식이 존재론적 문제로 될 때에는 가능성 가능적 완전성완전성으로 표현된다. 이때의 완전성은 가능이 남김없이 구현됨을 뜻하며, 가능적 실재성은 결여로서 주어

져 있다. 이것이 인간존재 문제로 환원될 때에는 가능적 존재 자체현존재구현적 존재 자체로 된다. 이를 단수, 복수적 문제로 세분하면, 일치=진아불일치=단독자일치=범아가 된다. 이러한 도식에서는 현존재가 중심에 위치한다. 이때 중간적 존재인 가능적 실재성으로서의 현존재에게 그 가능성의 구현적 완전성은 항상 미래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현존재가 완전성을 구체적으로 구현한다는 생각은 오류다. 또 완전성은 여기서 가능성의 궁극적 단계이기에, 이미 가능적 운동의 전진이 종결됨 을 의미한다. 만일 이 완전성을 처음부터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은 시간적 현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그 예후를 보고 완전성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현존재는 오직 불일치운동 및 관계 속에서만 자기존재를 확인한다. 운동과 관계의 첨예화를 통해 복수에서 단수로 나아감으로써 자기존재를 확인한다면 그는 회향적 존재다.

 

그러나 오직 운동과 관계의 다양화로 나아간다면 그는 실향적 존재다. 현존재적 인간의 모습, 즉 결혼, 잉태, 출산 등은 무수한 관계의 다양화로 나아가며, 각자는 자신의 실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가 아니라 자유의 확대를 수반하는 인간의 회향은 일상 외적 투쟁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것은 일치와 실제의 유(), 정지와 탈관계로의 진전이다. 현존재적 인간은 자기존재의 확인을 위해 끝없이 실향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싸우기를 즐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찢어 상처를 내고 괴로워하는 아이들과 같다. 그들은 자기존재의 확인을 위해 자극을 생산하고 긴장을 초래한다. 그들은 관계를 더욱 다양화하여 무수한 개체로 머물며, 파쟁과 분리를 증대시키고 그 고통 속에서 자기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언제나 수은의 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합일로 향한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지닌 신비로운 힘이다. 우리가 회향을 이루려면 현존재적 나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탈-현존재를 결행함으로써만 일체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치 영역에서 탈관계와 일치를 이룩하고 정지, 즉 존재 자체의 모든 본질을 완수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탈세간의 공()과 멸()을 성취하여 일체의 현존재를 초탈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존재 자체를 완성하고 가능성의 전 영역을 완전히 실현하는 회향이다.

 

회향적 존재는 투쟁적 인간이다. 반대로 비투쟁적 인간은 비회향적 존재다. 투쟁적 인간은 실천적 이성의 주체이자 목적 그 자체인 존엄성을 지니는 존재이며, 회향의 싹을 키우는 존재다. 이러한 구조에서 볼 때 현존재는 모두 무상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실제의 유가 아니며 경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신이야말로 현존재의 구원인 실제 유를 찾는 것이다. 이 현존재의 실제유는 동물적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존재적 인간에 내재하는 실천적 이성의 주체인 이성적 인간에 의해 구현된다.

 

현상계의 존재 자체도 그 자체로는 유이자 무. 단지 현존재인 우리의 인식에서 그것은 존재()로 전락하고 무와 대립한다. 이때 존재는 정지일치의 모습을, 무는 불일치의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존재적 사실을 하나의 개념, 즉 불일치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인식은 현존재적 관계인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식 자체는 관계에 대응할 수 있는 선험적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동시에 관계 속에 있는세계의 각사물 일체는 각각의 존재적 특성을 통해 다원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이때 자연적 존재물 각각의 인식에 의해 파악되는 그 존재 영역을 초월한 물자체의 영역을 유추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유이자 무의 영역이다. 물자체는 인식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가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인식되고 현존재적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 유이자 무의 영역이라면, 모든 현존재적 사물의 시작은 유이자 무’, 즉 정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유이자 무는 무한의 영역이다. 이것은 존재와 무의 영역을 초월한 광역, 시공을 초월한 선험적 가능태다. 회향은 이것을 완전히 채우는 것이다. 현존재는 이것을 채우지 못하기에 존재 자체와 언제나 불일치가 된다. 우리는 현존재의 경험적 사실을 유한한 것으로 포착한다. 인식은 이러한 유한한 것을 제시할 수 있는 무한량, 비제약의 영역, 시공을 초월한 영역을 선험성으로서 전제한다. 우리는 우리를 현존재적 자아로만 파악할 때, 즉 상황과 결부하여 파악할 때 회향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언제나 제약을 당위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경험성을 반성함으로써만 선험성 내지 인식 자체에 도달할 수 있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월 영역으로 서의 존재 자체에서 이탈해 있다. 그로 인해 초월로의 이행인 진보와 전진이 의미 있게 된다.

 

현존재적 상황으로서의 비극을 직시하고 그 비극인 불일치 속으로의 추락의 원초적 기원을 탐구할 때, 그리고 비극은 죄의 결과라는 신화적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때, 비극은 인간존재 자체를 암시해 주고 그 암시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복수적 존재 임과 인간의 연대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비극의 암호 속에 담겨 있다. 연대는 원죄의 문제에서는 신화적 암호 속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지만, 인간의 목적성을 고려하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원죄에 대한 의식은 개별인간의 행위와 생활을 넘어서는 인간의 근원이 만인에게 공통됨을 말한다. 그러나 비극을 넘어 일치를 향해 나아가며 회향이라는 목적을 조망할 때 그 연대는 현실적 박진감을 띠며 드러난다. 연대관계를 찾지 못하는 목적상실 상태의 인간은 가슴을 찢는 무서운 현실, 타살 과 파괴, 모든 참혹함과 비참함에 대한 진지한 감수성과 영혼의 심오함을 잃어버린다.

 

현존재는 운동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또한 그 진리의 제약을 발견한다. 이것이 현존재의 과정이고 그 과정은 비극적이다. 이 비극은 자유를 조감하고 그 목적 속에서 소멸 원리를 발견할 때만 극복된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현존 재의 해방인 현존재의 파멸에서만 죽은 자 자신의 내부에서 내면적 화해가 실현되고 비극은 구원의 환희로 전환된다. 현존재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다만 침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침묵은 투쟁 속에서 함성으로 변하고 운명은 자신의 것이 된다. 현존재는 시련을 통과하며 자신의 현존재를 탈피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희열을 얻을 수 있다. 현존재 자체는 언제나 실향적 불일치 상태로 존재하며 참된 희열은 오직 존재 자체와의 일치를 향한 진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현존재에 대한 회향적 존재의 원초적 정념은 비애다. 이 비극적 현실의 배후에 진정한 희열로 향하는 안내자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의 대다수 민중이 하나의 나사처럼 직업에 종사하고 매일매일 빈궁 속에서 전직의 자유도 박탈당한 채 노동하며 삶의 시간을 단축할 뿐일 때, 희망 없는 그들에게 제시되는 공허하고 도 설득력 없는 위로의 말, 즉 그들의 장시간 노동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말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물에 친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향, 곧 자기존재의 회복은 사물과의 친숙함에 따르는 숙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분화된 분업적 사회구조가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직 숙련뿐이다. 이때 그는 자기가 속한 분업분야를 묶을 사회의 총체적 산업에 자신을 연관 시킴으로써 의의와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의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또 다른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숙련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서 얼마만큼의 자유를 획득하는가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현존재와 강력히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현존재의 가장 숭고한 인간상, 회향을 지향하는 존재의 본보기다. 그는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한 전형적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이 회향을 지향하는 한, 그는 추앙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기독교의 강력한 힘은 현존재적이면서 지향성 을 지닌다는 데에 있다.

 

불교는 기독교가 숙제로 남긴 부분, 즉 회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회향이 문제이며 현존재는 오직 그 출발로서 의의를 가질 뿐이다. 가능성과 실재성을 공유하는 현존재적 인간은 그의 의식을 규정하는 메커니즘에 의해 운명 지어지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인간존재를 전개할 가능적 예후 속에 사는 존재다. 또 그는 미래의 인간이 현재의 인간들에 의해 운명 지어진다는 것도 아는 존재다.

 

현존재로서 인간은 역사 과정 속의 한정된 장소에 위치할 뿐이다. 그는 상황의 강제성특수성변화성이라는 조건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 속에서 단지 국부적 전망을 분열상태에서 얻을 뿐이다. 그의 존재는 시간과 장소의 함수관계로 결정되는 좌표에서 확인된다. 누구도 자기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그가 역사 전체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말은 오류일 뿐만 아니라 몰역사성으로 귀결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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