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의대중퇴생의 놀라운 깨침
현대 자본주의체제는 눈부신 생산력 발전을 통해 지상낙원을 우리 코앞에 끌어다놓은 듯하다. 우리가 상상해온 온갖 상품들과 첨단과학기술의 혜택은 신의 은총처럼 온 세상을 덮으며 만인의 삶을 자본의 영혼에 따라 성형해놓을 태세다. 그런데 우리를 낙원으로 이끄는 듯한 바로 그 엄청난 생산력은 지구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맑스의 지적처럼 생산력의 증대 자체 가 일반적 이윤율 저하와 무정부적 과잉생산 등으로 자본증식의 한계에 부딪칠 때, 자본이 자체의 무한증식본성을 버릴 수 없는 한 절대다수 대중의 희생을 통해 한계를 타개하려 드는 것은 필연(必然)이다. 그 한계 타개의 전형적 방식인 대량해고와 환경재앙 그리고 전쟁은 이미 맹렬히 진행 중이다.
지구를 언제라도 지옥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이 재앙들의 밑바탕에는 오늘의 자본주의를 절대화 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 감각, 욕망구조가 있고,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해온 자본주의적 지배관계가 있다. 인류는 지옥행 특급열차의 꼬리칸에라도 앉아 다가오는 지옥풍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것인지, 근본적으로 궤도를 수정하여 낙원의 건설에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을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후자를 택하는 한 우리는 대안질서(代案秩序)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패배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노력은 전혀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또 대안을 찾고자 고민하는 사람들도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을 논증하는 데에 머물면서 운동방법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분열을 겪기 일쑤다. 특히 대안질서를 위한 인간관 및 세계관의 구상은 아직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40여년 전, 유신반대 투쟁을 하던 스물여덟 살짜리 경북대학교 의대 중퇴생이 강제징집된 후 군대생활을 하면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칸트의 선험철학과 헤겔의 변증법, 실존주의와 맑스주의, 기독교와 불교사상 등을 종합하여 인류가 추구할 만한 미래사회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구상해냈다면, 이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승효, 그는 꽃다운 나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안은 채 유신독재폭력의 희생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해방투쟁에 ‘목숨을 바친 세계의 자유시민’과 ‘독재를 향해 지금도 선전을 포고하는’ ‘자랑스러운 동료들’에게 바친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은 대안질서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고 되새길 만한 역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승효의 사상은 반세기 가까이 아예 빛도 보지 못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유고는 미완성이었다. 전체적인 틀은 잡혀 있었지만 세부 주제들에 대한 메모 수준의 단편적 서술들이 계획과 별도로 풍부하지만 산만한 상태로 산재해 있었다. 개인적인 학습에 필요한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논의의 흐름을 끊어놓는 부분들도 없지 않았다. 많은 내용을 담고자 하는 의욕이 문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난해한 수식어들의 중첩(重疊)으로 읽는 사람을 괴롭히기도 했다. 문장들이 꼬이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방대한 사상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재평가하는 글들인지라,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고 여러 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측면도 중요한 장점이지만 접근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전면적으로 새롭게 편집하고 현대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교정을 하지 않고는 책으로 내놓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편집 과정에서는 소제목들을 포함해 중복되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최소화했다. 산재한 단상들을 일목요연한 체계에 따라 재배치하기도 하고, 저자가 붙이지 않은 소제목들을 내용에 근거해 새로 붙이기도 했다. 어색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은 본래의 뜻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에서 다듬었다. 이 책의 강세가 전문 연구자의 학술저서로서 학문적 엄밀성이나 성과를 자랑하기보다 인류의 미래진로에 대한 사고를 촉구하는 데에 있다고 판단하여, 저자가 인용하는 문헌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작업은 전체적으로 포기했다. 그렇더라도 본서가 인류의 주요 유산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우리가 추구할 만한 미래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현승효 자신의 저서라는 사실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독자적 사상 덕분에 대대적인 편집과 교정을 거치고도 이 책의 일관성과 깊이는 전혀 손상될 수 없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현승효 사상의 중심에는 회향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말 ‘회향’은 중의적이다. 한자로는 불교와 유교에서 각각 ‘回向’과 ‘回鄕’으로 달리 쓴다. 그 의미도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그러나 둘 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얻은 것을 다시 베푼다는 뜻에서 상통 한다. 본서에서 ‘회향’은 말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때 고향은 인류가 오늘날과 같이 갈등과 불행에 빠지 기 이전의 상태를 뜻한다. 에덴동산이나 원시공산사회가 그런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들이다.
고향의 본질을 현승효는 자유 자체에서 찾는다. 그는 자유 자체란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는 상태이자 현실에서 자유가 구현되기 이전의 가능성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이 가능성으로서의 자유 자체야말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해방투쟁의 궁극적 근거 라고 본다. 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과 관계 속에서 분열과 괴로움을 겪으며 생존에 매달리는 현존재의 던져진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주객 분리 이전의 일치 상태인 진정한 자아, 즉 진아를 찾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일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인식과 의지적 행위를 그는 자투(自投)라고 칭한다.
그는 이 회향의 과정이 현존재로서의 개인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현존재 상태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비아 및 타자와도 일치를 이루는 범아를 형성함으로써만 완전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범아 형성을 막는 제반 관계들을 극복하고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인류의 주요 종교, 예술, 철학, 그리고 경제적 토대와 국가 등의 발전사 전체를 범아 추구의 과정으로서 해석하고 평가한다. 이 과정을 그는 ‘일치(진아)−불일치(현존재)−일치(범아)’의 도식으로 요약하기도 한다.
인류가 추구해 온 회향의 길을 현승효는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천재적인 예술창작을 통하거나 초월적 존재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내맡기거나, 아니면 자신의 현 존재의 덧없음을 깨닫고 현 존재의 제반관계들과 단절함으로써 열반(涅槃)에 이르는 개인 차원의 회향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만인이 모두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부단히 현존재 속에서 범아를 추구하며 투쟁하는 합일적 회향방법이다. 회향적 인간학을 주창하는 그는 후자를 더 중요시 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소외와 계급적 대립을 극복하고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는 맑스주의를 높이 평가한다. 또 각 민족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려는 국제주의를 옹호하며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국가를 바람직하다고 본다. 궁극적으로는 맑스주의가 내세우는 국가사멸론에도 동의한다.
그렇다고 현승효가 맑스주의를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체의 완전성을 표방하는 어떤 사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현존재의 차원에서는 그 무엇도 완전성을 이룰 수 없다는 관점에서 ‘현 존재적 완전성’은 근본적 으로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눈에 맑스주의는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특히 맑스주의가 초월적 영역에 대해 무관심함으로써 범아의 형성에 한계를 보인다고 평가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맑스주의에 근거를 두는 공산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양자를 지양⋅ 종합하는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보며, 사회민주주의를 그러한 체제라고 생각한다. 또 초월적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는 종교와 예술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철학적 인간학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자신의 ‘회향적 인간학’을 제시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초월적인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 외부의 신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포이어바흐를 끌어들여 신은 인간 자신의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관념(觀念)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초월적 존재를 인간 자신에게서 찾으며, 그러한 존재가 범아다. 범아는 “현 존재와의 단절과 독립을 통해 확장적 완전성 속에서 전망되는 초월이며, 일치의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대상임과 동시에, 인간상호적 현실속에서 형성 되어가야 하는 것이다.”
현승효는 범아(凡我)의 형성을 통해 자연과 신과 인간이 합일에 이르고 회향이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회향이 완성된 상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즉 모든 것이 통일된 범아의 세계는 “모든 상황적 불일치가 해소된 상태, 진아만이 숨쉬는 상태”, “일체의 제약과 투쟁이 해소된 영역이며, 감정도, 자유의지도 이미 잠든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는 “비아도 자아도 없고, 투쟁도 갈등도 없다. 생과 멸도 없고, 선악도 없는 것이다. 지혜도 무명도 이미 지하에 묻혔다. 어둠과 밝음의 대립도, 진위 도 없다. 말할 것도, 가르칠 것도, 식별할 것도 없고 오직 침묵의 정적만이 감돌 뿐이다.” 이때 인류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마침내 완벽한 자유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현 존재는 회향을 완성할 수 없으며 그 완성을 향해 부단히 투쟁할 뿐이지만, 이처럼 일치의 완성을 상정함으로써 현승효는 인간의 역사가 무한히 반복되는 자연의 운동과 구분되며 일회성 을 띤다고 주장한다. 또 회향의 전제인 현 존재적 관계들의 단절 로 인해 비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뿐만 아니라 회향적 인간은 회향을 위한 투쟁에서 결코 타인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맹목적 삶의 의지에 지배되지 않는 한에서 기꺼이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향을 위한 투쟁에 인간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현승효 사상에서 여러 철학과 종교 사상의 요소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열반을 향해 정진하는 자세에서는 불교와 아울러 쇼펜하우어를 떠올릴 수 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회향론의 골간(骨幹)을 이룬다. 현 존재의 던져진 상태를 탈피하고 자투를 통해 자유 자체 혹은 일치를 추구한다는 구상은 실존주의를 떠나서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일치−불일치−일치’라는 틀은 자연스럽게 변증법과 관련지을 수 있다. 현승효는 헤겔의 세계정신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대립 물의 통일이나 내재비판 등 변증법의 주요 요소들을 적극 받아들여 논의 전개의 도구로 활용한다. 자유 자체를 실체로 상정하는 그의 핵심 전제부터가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과 동질적이다. 그가 말하는 자아와 비아의 대립과 통일에서 피히테를 떠올릴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칸트의 물 자체, 시간과 공간, 아프리오리, 세계공화국 개념 등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회향의 관점에서 칸트의 논의를 벗어나기도 한다. 또 그는 관념론과 대립하는 포이어바흐나 맑스의 유물론을 끌어들이면서도 초월성에 대한 문제의식에 근거해 유물론을 관념론과 종합하고자 한다. 실존주의의 핵심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니체의 허무주의 극복방법에 대해서는 현 존재의 영역에 대한 긍정에 머문다고 비판하며, 키르 케고르나 하이데거가 단독자 차원에 머물러 범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에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자연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하우저의 예술사 논의를 초월성과 일치라는 회향적 문제의 식에 비춰 비본질적인 구분이라고 보기도 한다.
흔히 철학 전공자들이 자신의 전문영역에 갇혀 특정 사상을 절대화하고 현실적 실천적 의의에 대한 논쟁적 검토 없이 비본질적 세부 논의에 매몰되거나 단편적인 적용과 효용에 만족하는 데에 반해, 현승효는 회향적 인간학이라는 척도에 근거해 어떤 사상이든 자신의 체계 속에 끌어들이고 종합해내고자 한다. 이러 한 능력 역시 변증법적 사유방법 덕분이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젊은 나이와 군대라는 특수한 집필 환경, 그리고 지극히 억압적이었던 당대의 정치현실을 감안할 때, 그가 이룩한 종합적 사유의 성과는 실로 경이로울 따름이다. 자본권력 에 대한 예속관계를 당연시하고 그 속에서의 생존과 신분상승을 위해 온통 영혼을 팔면서 현존 지배질서 너머의 풍요로운 세계에 대해 아예 눈 감고 있는 오늘의 지적 풍토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근본적 의식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변혁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현승효가 극단적 반공정권인 유신독재 치하에서 맑스-레닌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의 체계 속에 본질적 요소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경외심(敬畏心)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념론을 적극 활용하는 회향의 논리를 따라가기는 불편할 것이다. 특히 그 골간을 이루는 ‘자유 그 자체’나 ‘진아’혹은 운동의 ‘완성’과 ‘정지’등의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와 대립하는 형이상학적 실체화의 산물이라고 보고, 그것은 현승효 자신이 비판하는 오류추론의 한 가지일 뿐이며 과학적 현실인식과 운동 전략에 별 도움 안 되는 지적 유희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평가하는 데에 대해서도,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가 겪어온 변화를 감안할 때 그러한 평가 또한 당대적 한계의 산물이라고 보아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또한 맑스의 자연철학과 인간관 혹은 동학사상을 함께 공부했다면 좀 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성과를 거두었으리라고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 논리에 충실한 그의 사유 전개를 따라간다면, 협소한 정파의 울타리를 허물고 운동의 통일 방안에 대해 고심할 필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형이상학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자체나 진아 혹은 범아 역시 투쟁을 통해 구현해야 할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투쟁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자극으로서 긍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변혁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변혁운동을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빈곤한 오늘의 운동 문화를 감안할 때, 자연과 인간과 초월적 존재의 합일을 추구하는 현승효의 문제의식을 골동품 취급하고 간단히 관념론이라는 분류표를 붙여 사상의 박물관에 넣어둘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초월적 존재를 인간의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찾고, 현 지배질서 속의 맹목적 생존이나 지위상승 따위 가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 내지 자유의 구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자는 데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인 차원의 깨달음이나 구원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회향을 완성하는 범아의 세계를 이룰 때까지 현 존재의 영역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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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현승효의 ‘영원한 연인’ 노천희 덕분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망각 속에 묻힌 채 출판을 기다리고 있던 원고의 편집을 편집자에게 일임해주고 출판비용을 전액 부담했을 뿐 아니라 편집과 교정 과정에 유용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저자의 본래 의도가 혹시라도 훼손(毁損) 되었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편집자의 몫이다. 오늘날 자본의 맹목적 무한증식 본성에 끌려 총체적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문명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대안 질서를 건설하는 과정 어디서든 현승효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는 그렇게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넘쳐난다. 인류가 추구할 미래 사회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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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현승효(1950~1977)는 1971년 경북대학교 의대에 입학한 후 1972 년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 가담하여 1974년 1월 경북도 대공분실에서 7일간 심문을 받았다. 1974년 12월 경북대학교 의대에서 제명되고, 1975년 2월 강제징집 당했다. 1977년 6월 29일 제대를 4개월 앞두고 구보 훈련 중 쓰러져 사망했다. 군복무 중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투쟁 >을 집필하여 유고로 남겼다. 군에서 들킬까봐 피를 말리며 몰래 작은 수첩에 깨알같이 적은 일기문 10개와 연인 노천희가 엮은 두 사람 사이의 편지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가 2007년 발간되었다.
글 홍승용 | 현대사상연구소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