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부자동네 조선인은 가난한동네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1924년 3월 9일 동아일보는 ‘조종(弔鐘)을 우리는 경성 조선인의 말로(末路)’라는 제목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 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1910년 일제에 합병된지 14년이 지난 그즈음 경성(서울)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살기 좋은 지역과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궁상 가득한 빈촌이 되버린 것이다. 동아는 먼저 <향촌 농민이 남북 만주로 쫓겨 가는 것과 같이 경성 시민은 북부조차 떠나 문밖으로 몰리는 전율(戰慄)할 이 숫자를 보라!>는 소제목으로 시선을 끌었다.
본문에선 “현재 남부를 비롯하여 용산 일대는 일본인의 차지로 장래가 유망한 살기 좋은 곳이 되었고 북부를 중심으로 동서부의 일대는 조선인촌으로 어디로 보든지 궁상(窮狀)이 가득한 빈촌이 되고 말았는데, 이제 이 유일한 조선인의 근거지가 다소간 장래의 희망이 있게 되자 또다시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며 동별 가구수와 증감을 표시한 표 7개를 곁들여 대서특필 한 것이다.
살기 좋은 지역에서 일본인 가구의 급속한 팽창에 대해 “이 무서운 숫자는 문득 일본인 세력이 이만큼 팽창하여 북부와 이웃한 위의 여러 곳까지 몇 날을 지나지 아니하여 진고개와 같은 완전무결한 일본인촌이 되고야 말아 버릴 운명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종로의 경우, “이곳으로 몰려오는 일본 사람의 호수는 4~5호 내지 10여 호인데 쫓겨 가는 조선인 호수는 40~50호로부터 100여 호 내지 300호 라는 무서운 숫자에 달하니, 이같이 많은 가족들이 옛터를 버리고 가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한탄했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기사 원문과 번역본을 소개한다.
☯ 조종(弔鐘)을 울리는 경성 조선인의 말로(末路) (1924.03.09.) 동아일보
향촌 농민이 남북 만주로 쫓겨 가는 것과 같이
경성 시민은 북부조차 떠나 문밖으로 몰리는
전율(戰慄)할 이 숫자를 보라!

경성 전체를 북부(北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용산(龍山)의 다섯 군데로 나누었음은 경성부 행정상 반듯이 하여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대소변을 치거나 쓰레기를 소제하거나 길가에 물을 뿌리거나 더러운 곳에 소독을 하거나 하는 등 위생 사업과 완전한 길을 내거나 나쁜 길을 고치거나 하수구의 설비를 충실히 하는 등 토목 사업을 하기에 선후 완급(緩急)의 분명한 차서(次序)를 밟아서 규칙있게 사업을 진행하려는 필요로 생긴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구별이 생기던 남북부는 이같은 구별이 생김을 따라서 더욱 어느 곳은 깨끗하고 살기 좋고 장래가 유망하게 되는 한편으로 어느 곳은 그렇지 못하여 눈치 빠르고 세력있는 자는 살기 좋은 데로 몰리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렇지 못한 데로 몰리어 마침내 어느 곳은 번창하고 어는 곳은 소조(疏阻)하다 하여 번창한 곳에는 시설을 더 하고 소조한 곳에는 아는 체 아니하여 번창한 곳은 더욱 번창하고 소조한 것은 더욱 소조하며 더욱 번창하니, 더욱 시설하고 더욱 소조하니 더욱 돌보지 아니하여 이같이 원인과 결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안에, 편의상 임시로 마련한 구별은 마침내 이해(利害)가 다르고 정도가 고르지 못한 특수한 부락으로 나뉘고 말았으니, 현재 남부를 비롯하여 용산 일대는 일본인의 차지로 장래가 유망한 살기 좋은 곳이 되었고 북부를 중심으로 동서부의 일대는 조선인촌으로 어디로 보든지 궁상(窮狀)이 가득한 빈촌이 되고 말았는데, 이제 이 유일한 조선인의 근거지가 다소간 장래의 희망이 있게 되자 또다시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숫자 중 ▲은 증(增), ▼는 감(減)이며 상단은 1922년 하단은 1923년)
남부는 저들의 독무대
조선인이 한 걸음도 못 딛는
남부 발전과 진고개의 연장
현재 남부 일대에 있는 사람은 거의 전부가 일본 사람이고 북부 일대에 있는 사람은 거의 전부가 조선 사람이므로 따라서 일본 사람은 남부를 중심으로 조선 사람은 북부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될 것이다. 이제 재작년(1922년)말 현재와 작년(1923년) 별로 보건대, (수백에 가까운 정동(町洞)을 다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그 대략만 소개함)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욱정(旭町) 2정목 | 230호 | 232호 | ▲2호 |
본정(本町) 4정목 | 497호 | 501호 | ▲4호 |
본정(本町) 5정목 | 269호 | 272호 | ▲2호 |
황금정(黃金町) 3정목 | 417호 | 423호 | ▲6호 |
영락정(永樂町) 1정목 | 151호 | 153호 | ▲2호 |
앵정정(櫻井町) 2정목 | 390호 | 395호 | ▲5호 |
대화정(大和町) 2정목 | 423호 | 433호 | ▲10호 |
남대문정(南大門町) 5정목 | 155호 | 168호 | ▲13호 |
남산정(南山町) 2정목 | 154호 | 161호 | ▲7호 |
어성정(御成町) | 127호 | 129호 | ▲2호 |
이상의 여러 곳은 원래 일본 사람의 뿌리가 깊고 넓게 박혀 더불어 갈 여지도 없이 아주 완전무결하게 일본 사람의 무대가 되어 있는 까닭으로 위와 같이 한 군데에 10호(戶) 미만으로 늘어온 것이며,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욱정(旭町) ○정목 | 540호 | 567호 | ▲27호 |
영정(榮町) | 175호 | 194호 | ▲19호 |
화천정(和泉町) | 253호 | 270호 | ▲17호 |
연병정(練兵町) | 250호 | 269호 | ▲19호 |
원정(元町) | 473호 | 502호 | ▲29호 |
대도정(大島町) | 198호 | 225호 | ▲27호 |
고시정(古市町) | 156호 | 200호 | ▲44호 |
한강정(漢江町) 16번지 | 563호 | 606호 | ▲43호 |
주교정(舟橋町) | 70호 | 124호 | ▲54호 |
강기정(岡崎町) | 158호 | 223호 | ▲65호 |
삼판통(三坂通) | 214호 | 279호 | ▲65호 |
황금정(黃金町) 5정목 | 46호 | 120호 | ▲74호 |
초음정(初音町) | 274호 | 332호 | ▲62호 |
황금정(黃金町) 1정목 | 67호 | 116호 | ▲49호 |
병목정(並木町) | 230호 | 344호 | ▲114호 |
이상의 여러 곳도 일본인의 세력 아래 있는 소위 남부로 매약한 조선인은 원래 한걸음 한치도 나아가 밟아 볼 수 없는 곳이나 일본인은 얼마라도 정복해 갈 만한 여유가 작작한 곳이므로, 위와 같이 한 군데에 20~30호로부터 50~60호 내지 100여 호씩 대번에 불어가는 것이니, 이 무서운 숫자는 문득 일본인 세력이 이만큼 팽창하여 북부와 이웃한 위의 여러 곳까지 몇 날을 지나지 아니하여 진고개와 같은 완전무결한 일본인촌이 되고야 말아 버릴 운명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파죽(破竹)의 세(勢)로 북촌 일대를 점령
총독부 청사를 중심으로 몰려오는 일본인의 주택
그러나 위의 여러 곳은 원래 남부라 남부에 뿌리를 박은 일본인이 남부에 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나, 근년에 이르러 행인지 불행인지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안에 신축하게 됨을 따라 경성부청도 태평통으로 완정(完定)되고 복심법원, 지방법원도 광화문 앞으로 옮아 간다 하고, 현재에도 체신국, 진체저금관리소, 전화 분국, 경기도청, 경찰부 등이 한 곳에 모여 광화문통, 태평통 일대는 완연히 관공서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추문(迎秋門) 전차의 연장으로 적선동, 효자동, 청운동 일대는 사직동, 서대문정의 관사(官舍) 지대와 아울러 장래가 매우 유망하게 되었고, 안국동을 중심으로 한 북부 일대는 원래 관공사립의 각종 학교도 많을 뿐 아니라 근년에 이르러 송현동에는 돈 많은 식산은행의 사택(社宅)이 한 촌락을 이루었고 더불어 안국동 전차도 개통되었으며 다시 불원(不遠)한 장래에 북부의 횡단 간선도로가 완성될 터이므로 이곳도 역시 얼마 되지 아니 하여 크게 발전될 가능성이 충분하며 더욱 면적도 넓고 땅값도 헐하고 인가도 조밀(稠密)치 아니 하여 벌써부터 개척해 주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동소문 안과 동대문 밖 일대에도 근래에 관공사립학교 등을 자꾸 세워 은연한 가운데서 부민을 그리로 집중되게 함에, 이곳도 역시 장래에 주목할 만하게 되어 마르고 거친 궁상만 남아 있던 북부의 조선인촌도 굳게 자리를 잡고 노력만 들이면 남부에 지지 않을 만하게 되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조선 사람들은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눈치 빠른 일본 사람은 벌써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가난한 조선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손을 내밀게 되니,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조선 사람은 목전(目前)의 고가(高價)를 탐하여 집을 팔고 땅을 팔아 (누보(屢報)한 바와 같이 시가지세와 가옥세가 줄어가는 것을 보아도) 마침내 북부 일대는 줄달음으로 일본인의 소유가 되는 모양인데, 우선 산 집에서 살림까지 하는 일본인의 호수(대개는 집을 사서 당분간 세를 줌)를 조사해 보건대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도렴동(都染洞) | 7호 | 11호 | ▲4호 |
간동(諫洞) | 4호 | 8호 | ▲4호 |
장교정(長橋町) | 65호 | 69호 | ▲4호 |
창신동(昌信洞) | 9호 | 13호 | ▲4호 |
당주동(唐珠洞) | 8호 | 12호 | ▲4호 |
봉래(蓬萊)3동 | 53호 | 58호 | ▲5호 |
가회동(嘉會洞) | 11호 | 16호 | ▲5호 |
현저동(峴底洞) | 9호 | 14호 | ▲5호 |
효자동(孝子洞) | 38호 | 43호 | ▲5호 |
관수동(觀水洞) | 44호 | 49호 | ▲5호 |
종로(鐘路) 2정목 | 10호 | 15호 | ▲5호 |
궁정동(宮井洞) | 17호 | 23호 | ▲6호 |
수표정(水標町) | 51호 | 57호 | ▲6호 |
광희정(光熙町) | 39호 | 45호 | ▲6호 |
원동(苑洞) | 14호 | 20호 | ▲6호 |
충신동(忠信洞) | 7호 | 13호 | ▲6호 |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효제동(孝悌洞) | 6호 | 12호 | ▲6호 |
원남동(苑南洞) | 132호 | 153호 | ▲21호 |
연지동(蓮池洞) | 15호 | 26호 | ▲11호 |
미근동(渼芹洞) | 89호 | 107호 | ▲18호 |
의주통(義州通) 1정목 | 89호 | 107호 | ▲18호 |
죽첨정(竹添町) 3정목 | 49호 | 68호 | ▲19호 |
평동(平洞) | 52호 | 62호 | ▲10호 |
임정(林町) | 79호 | 89호 | ▲10호 |
입정정(笠井町) | 48호 | 51호 | ▲3호 |
서대문통 2정목 | 83호 | 86호 | ▲3호 |
동숭동(東崇洞) | 17호 | 20호 | ▲3호 |
연건동(蓮建洞) | 29호 | 31호 | ▲2호 |
수송동(壽松洞) | 14호 | 16호 | ▲2호 |
낙원동(樂園洞) | 23호 | 26호 | ▲3호 |
관훈동(寬勳洞) | 21호 | 24호 | ▲3호 |
익선동(益善洞) | 23호 | 26호 | ▲3호 |
적선동(積善洞) | 25호 | 28호 | ▲3호 |
중학동(中學洞) | 32호 | 35호 | ▲3호 |
광화문통(光化門通) | 82호 | 94호 | ▲12호 |
창성동(昌成洞) | 37호 | 44호 | ▲7호 |
이상의 숫자에 의지하여 일본 사람들이 방금 어느 방면으로 활동하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 터인데, 한 군데에서 불어가는 수효가 5~6호로부터 10호 내지 20호로 숫자 그것은 비록 많지 않다 하더라도 일본 사람 한 명의 힘이 조선 사람 수십 명을 대항하는 현재에 있어, 일본인 1호(戶)는 조선인 수십 호를 위협할 터인 즉 결국 일본인 5~6호 내지 10여 호의 증가는 조선인 일 정동(町洞)의 생명에 관계가 있으니 오직 하나만 있던 북부도 제2의 남부가 되고 말아 버릴 것이다.
축출(逐出)되는 조선인
살기 좋고 유망한 곳을 떠나
문 밖으로 쫓겨 가는 참상(慘狀)
일본 사람이 북부를 점령함을 따라 조선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북부는 떠나지 아니치 못하게 될 것이다. 재작년보다 작년에 북부로 옮아오는 일본인의 호수는 별항과 같거니와 이제 조선 사람이 줄어드는 상태는 어떠한 분수(分數)이며 어떠한 곳인가.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종로(鐘路) 1정목 | 239호 | 125호 | ▼124호 |
종로(鐘路) 2정목 | 222호 | 155호 | ▼67호 |
종로(鐘路) 3정목 | 267호 | 235호 | ▼32호 |
종로(鐘路) 5정목 | 601호 | 571호 | ▼30호 |
견지동(堅志洞) | 185호 | 157호 | ▼28호 |
공평동(公平洞) | 213호 | 167호 | ▼56호 |
소격동(昭格洞) | 280호 | 231호 | ▼49호 |
서대문(西大門) 2정목 | 265호 | 205호 | ▼60호 |
체부동(體府洞) | 363호 | 290호 | ▼73호 |
서린동(瑞麟洞) | 348호 | 209호 | ▼137호 |
관철동(貫鐵洞) | 877호 | 577호 | ▼300호 |
수은동(授恩洞) | 261호 | 255호 | ▼6호 |
수표정(水標町) | 195호 | 154호 | ▼41호 |
장교정(長橋町) | 227호 | 131호 | ▼96호 |
이곳으로 몰려오는 일본 사람의 호수는 4~5호 내지 10여 호인데 쫓겨 가는 조선인 호수는 40~50호로부터 100여 호 내지 300호 라는 무서운 숫자에 달하니, 이같이 많은 가족들이 옛터를 버리고 가는 곳은 어디인가. 해서(海西; 황해도) 주민이 조선흥업(朝鮮興業)으로 인하여, 영남(嶺南) 주민이 동양척식(東洋拓殖)으로 인하여, 호남(湖南) 주민이 불이흥업(不二興業)으로 인하여 각각 옛터를 버리고 국외에 헤매는 것과 같이 북부의 조선인도 일본인의 북진(北進)으로 인하여 북부를 떠나되 남부는 원래 꿈도 안꾸는 곳인 즉 몰려갈 곳은 오직 문외(門外)인
동명 | 1922년 | 1923년 | 증감 |
현저동(峴底洞) | 198호 | 409호 | ▲211호 |
혜화동(惠化洞) | 47호 | 190호 | ▲143호 |
광희정(光熙町) | 250호 | 585호 | ▲335호 |
교북동(橋北洞) | 428호 | 498호 | ▲70호 |
관동(館洞) | 436호 | 499호 | ▲63호 |
죽첨정(竹添町) 정목 | 607호 | 689호 | ▲82호 |
충신동(忠信洞) | 298호 | 357호 | ▲59호 |
창신동(昌信洞) | 808호 | 908호 | ▲100호 |
이촌동(二村洞) | 614호 | 707호 | ▲93호 |
으로 재작년보다 작년에는 한 군데에서 60~70호로부터 100여 호 내지 200여 호로 불었으니, 이는 거의 전부가 북부로부터 쫓겨나온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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