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의 애달픈 설 명절

상하이는 아름답지만 구슬픈 역사의 도시다.
1840년 아편 전쟁 패배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상하이와 텐진, 광저우 등에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리는 조계지(租界地)들이 설치되었다. 특히 상하이엔 1845년 11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약 100년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외국인 통치 특별구역이 존재했다. 외백교(外白渡橋)를 경계로 중국인들은 통행료를 내고 출입해야 했다. 아픈 기억을 갖고 있지만 와이탄(外灘)의 독특한 유럽풍 건물들은 밤이면 황토빛 황푸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을 계기로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의 법통을 세운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제국주의 일본의 탄압을 피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에서 폭탄을 던진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의거도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인 1924년 2월 17일 동아일보에 ‘호상(滬上 상해)의 정초(正初)’라는 기사가 실렸다. 동포들이 설 명절을 맞아 프랑스 조계지에서 윷놀이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임정을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이 동편 주장을 맡고 심판은 조소앙 선생이 봤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자세하게 실렸다.
근대뉴스(http://www.19c.co.kr/)가 제공한 100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 호상(滬上; 상해)의 정초(正初) (1924.02.17. 동아일보)
매봉가절배사향(每逢佳節培思鄕)
객창(客窓)에 찾아 온 새해여!
황포탄 여울 소리는 몇 번이나 목 맺혔으며
고향의 부모 처자들은 어떻게나 지내는고
고국을 사모하는 윷놀이
상해에 있는 우리 동포는 요사이 몇 백 사람으로 계산하는데 이 동포들은 소수의 장사하는 사람과 공부하는 사람들을 제한 이외에는 모두 그 무엇을 위하여 참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를 떠난 지가 5~6년 내지 10여 년이 되어 『서백리아』와 『만주 들』로 돌아다니며 별 고생을 모두 한 사람과 처음에는 왕성한 기운과 젊은 몸으로 나섰으나 지금에 와서는 기력이 소모되고 머리털이 희끗희끗해진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본국의 소식은 망연하여 자기의 집이 어느 곳에 있는지 부모와 가족의 안부가 어떠한지 전연히 모르는 사람도 있으며 심한 사람은 집에 돌아가려 한다 해도 집은 모두 없어져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도 드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평시에는 아무 것도 계념(繫念; 마음에 두고 걱정하거나 잊지 않음)할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다른 날과 다른 명절을 당하면 이 사람들도 그 무한한 느낌이 없어지지 아니 할 것도 사세(事勢)에 어쩌지 못할 일 일뿐 아니라, 더욱이 음력의 과세(過歲)를 할 때에는 중국 사람들이 폭죽과 땡매기로써 집집이 과세하는 일을 성(盛)하게 행하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우리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그 환경에 끌리지 아니 할 이가 없겠다. 그리하여 해마다 본국의 옛 풍속에 의지하여 윷놀이의 모임을 모아서 한편으로는 본국의 풍속을 기념하고 한편으로는 외로운 땅의 서러운 정회(情懷)를 위로하던 바, 금년 음력 정월 2일 (2월 6일) 밤에도 또한 그 전에 행하던 일에 의지하여 법조계(法租界; 프랑스조계) 『아이배로(亞爾倍達)』를 경계로 하고, 동서 양편에 나누어서 동편 편장 김구(金九)씨와 서편 편장 민모(閔某)씨와 심판원 조소앙(趙素昻)씨의 알선으로 밤이 새도록 50~60명의 윷놀이꾼이 서로 격렬한 경쟁을 하여 온갖 유흥을 하였는 바, 그 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우승기는 동편 사람들에게 돌아왔었고 윷놀이가 끝난 뒤에 기념사진까지 박았다더라.
기사 첫줄의 매봉가절배사향(每逢佳節培思鄕)은 왕유의 한시를 패러디한 것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獨在異鄕爲異客 독재이향위이객
每逢佳節倍思親 매봉가절배사친
遙知兄弟登高處 요지형제등고처
遍揷茱萸少一人 편삽수유소일인
(王維, 九月九日憶山東兄弟)
홀로 타향에서 나그네 되고 보니
매번 명절 때마다 가족 생각이 더 나는구나
멀리 있는 형제들은 높은 곳에 올라
머리에 수유꽃 꽂고 보니 한 사람이 없음을 알겠지
(당, 왕유, 구월구일억산동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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