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랩퍼가 되기 위해 미국유학을 왔다. 한국에서부터 ‘힙합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랩퍼’가 꿈이었다. 한국서 영어강사를 하다가 2001년 10월 한 살 터울인 누나와 함께 뉴욕에 왔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이었다. 흑인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떻게 하면 더 유창하게 랩을 할 수 있을까 온 신경을 쓰는 나날이었다. “진정한 힙합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기보다는 겉멋에만 취한 철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그에게 진정한 길을 찾게 해준 이는 하나뿐인 누이였다. 언제나 자신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누이를 보고 그는 문득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공부하면서 브룩클린 칼리지와 대학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원 재학시절, Asian Americ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과 Dig.It.All Film and Animation Festival 등에서 최우수 실험영화상을 해마다 거머쥐며 영화감독으로서 탁월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졸업후에도 실험영화와 댄스영화들에 천착(穿鑿)한 그는 최근 뉴욕서 열린 한국독립영화제(Korean Independent Film Festival) 에서도 ‘바운더리(Boundary)’가 선정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백평훈 감독은 오는 3월 1일 좀 더 특별한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바로 ‘아리랑 블루스(Arirang Blues, 7min.)’다. 맨해튼 소호에 위치한 The Flea Theater에서 열리는 “Dance Conversation 2011”에 선정된 이 작품은 지난해 10월 The Rover Soho에서 소개된 이래 많은 찬사를 모았다.
공교롭게 삼일절에 상영되는 아리랑 블루스는 백평훈 감독의 댄스 필름 3부작 중의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에서 이민 온 두 명의 아티스트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백 감독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한국 예술가들의 현실적 고난에 영감을 받아 작품 구상에 들어갔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로의 회귀 본능을 가지고 있다’라는 명제로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현재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순간들보다는, 아름답고 따뜻했던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기를 원하죠. 따라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으로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시점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영화 ‘아리랑 블루스’에서 음악과 영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찾아 볼 수 있다. 현대적 음악, 네온사인 불빛에 의존한 밤거리의 댄서들에 비례하는 한국의 음악, 아이들의 소리, 특히 구음(口音)으로 들려주는 가슴 찡한 아리랑은 과거의 향수와 현대의 공허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춤을 통해서 표현되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예술가의 인생을 걸어가는 현실과 과거에의 향수(鄕愁)를 표현하고 있다. 막상 미국에서 더욱 큰 꿈을 펼치리라는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 고뇌 속의 아티스트를 통해 문화적 소외와 이질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은, 자신과 평생 함께 해 왔던 예술이라는 것이다.
“Dance Conversation 2011”의 유일한 한국인 아티스트인 백평훈 감독은 ‘Arirang Blues’ 외에도 ‘Fear’라는 작품을 함께 상영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Fear, 1min.’ 또한 댄스 필름으로, 한국의 B-Boy 그룹 ‘Divinity in Motion’이 출연,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이유없는 불안감을 춤으로 표현했다.
백평훈 감독의 작품에는 항상 ‘한국’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댄스 필름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인 ‘Conflict Resolution’과 두번째 작품 ‘Boundary> 또한 뉴욕의 다수 영화제에서 많은 상과 찬사를 받았다. 백 감독은, “작품의 실험성도 돋보였지만 한국의 전통 문화예술을 소재로 삼은 것이 외국 관객과 심사위원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유독 한국의 문화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1년 미국에 온 이래 그는 다앙한 장르의 영상물을 기획 연출 촬영 편집 해 왔다. 10년이라는 유학 생활 동안,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에 더욱 더 애착이 갔다고 말한다. 한국의 문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굳혀왔고, 다민족 다문화로 이루어진 뉴욕에 한국의 문화를 자신의 영상에 담아 내는 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최근에 만든 예술영화 ‘Tree, 3min.’는 Sguardi Altrove Film Festival에 초청돼 이태리 밀라노의 Triennale Design Museum에서 상영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뉴욕에서 활동하는 나루 무용단과 함께 기획하고 촬영한 영상물이 CUNY 채널 75에서 26일 오후 6시 30분에 방영돼 눈길을 끈다.
“아리랑, 이 세 글자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면 그것은 우리 한민족이겠지요. 제2의 애국가라 할 수 있는 ‘아리랑’의 곡조와 가사속에는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있고, 각 지역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아리랑이 흩어져 오늘날 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2011년 삼일절, 새롭게 해석된 ‘아리랑’이 뉴욕 시티에 울려퍼지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영화는 오후 7시 The Flea Theater(41 White street New York, NY 10013)에서 상영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가슴에 오래 남는 영화 만들겠다”
1977년 서울에서 출생한 백평훈 감독은 고등학교 시절, 한국의 입시 위주의 교육에 절망하고 하루에 한편씩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기 시작했다.
앞서 밝힌대로 그가 처음 꿈 꾼 것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랩퍼였다. 군 제대 이후에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1년을 지내다가 2001년 10월,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한동안 흑인친구들과 어울리며 랩퍼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 가야할 길을 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브룩클린 컬리지와 대학원에서 영상을 전공하며 실험영화와 관련한 각종 상을 휩쓸며 뉴욕의 주목받는 한인 감독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국의 많은 감독들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임권택 감독과 김기덕 감독에 특별한 존경(尊敬)을 보낸다.
“임권택 감독님은 영상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아름다운 나라를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주었고, 김기덕 감독님은 적은 예산과, 등장인물, 간결한 대사 등, 힘든 여건과 화려한 기술이 없어도 훌륭한 예술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열정과 비전을 보여 주었어요. 그분들의 열정어린 결과물은 제가 힘든 환경 속에서도 예술 영화작업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보다는 가슴에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백평훈 감독은, “매일 매일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업데이트 되는 이 시대에, 항상 새롭고 비싼 붓을 추구하는 영화 감독들을 많이 봤다. 그러나 오랫동안 길들여진 자신만의 붓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영화들을 만들어, 더욱 나은 세상을 이루고 싶다”고 말한다.
뉴욕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지명도(知名度)를 얻고 있는 백평훈 감독은 현재 장편영화를 만들 계획 중에 있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그의 다음 작품은 내년 쯤 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