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배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중에서도 원효대사는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우리가 아는 존재 이상이었다.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 원효대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특별한 강연이 21일 뉴욕 원각사 큰법당에서 펼쳐졌다.
동국대 불교학과 김영일 교수가 이끈 이날 강연은 원효사상의 보기드문 전문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 1월부터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의 방문교수로 ‘원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 교수는 원각사 주지 지광스님의 특별한 부탁으로 이날 150여명의 불자들이 자리한 정기법회 시간에 원효대사의 간추린 생애와 화쟁사상을 강연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김영일 교수는 “원효대사가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출가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7세기초 신라에는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원효대사는 보덕 스님 등 당대의 덕높은 스님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불법(佛法)을 잇는 특정한 스승은 계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효대사와 관련해 유명한 설화(說話)는 당나라 유학을 떠났을 때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나이 서른셋에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며 여덟살 밑 도반(道伴)이었던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게 됐다. 당시 당나라는 인도로부터 수많은 경전들을 들여와 번역한 고승들의 존재로 불법의 깊이로는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나라로 가기 위해 고구려땅에 들어섰지만 고구려-백제 동맹과의 적대 관계인 신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구금되는 고초를 겪으며 1차 유학은 실패로 돌아갔다. 10년이 지난 후 백제가 망하면서 황해(黃海)의 길이 열리자 원효대사는 다시 의상대사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이때 옹진반도 부근 선착장에 도착했으나 심한 비바람에 뇌성벽력(雷聲霹靂)이 몰아치자 동굴로 피신했다가 해골바가지 물을 떠먹고 홀연히 깨침을 했다는 유명한 설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김영일 교수는 “이와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지만 조금씩 각색이 된 것으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은 따로 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학술적으로 인정되는 원효대사의 기록은 이렇다.
“원효대사는 그날 동굴에서 몸을 피하고 날이 밝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굴로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해골이 나뒹구는 무덤굴이었던 것이죠. 서둘러 선착장으로 갔지만 또다시 천둥번개와 폭우가 몰아쳐 무덤굴로 돌아가 비를 피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날 밤은 전날과 달랐습니다. 해골이 뒹구는 너무도 무서운 곳에서 귀신까지 나타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요. 바로 그때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 존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동굴하고 무덤굴은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지만 분별해서 들여다보니 하나가 아닌 둘이더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갖는 무수한 분별기준으로 모든 사물이 생기는 법이라는 것을 원효 스님은 동굴과 무덤굴의 인연을 만나 홀연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효대사의 일심사상(一心思想)이라고 김 교수는 정의했다.
원효 대사는 "이제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고 신라도 돌아와 중생교화를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치게 된다. 김영일 교수는 “원효대사는 중생교화를 위해 크게 세가지를 했다. 하나는 지식인을 위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저술했고 수행자를 위해 금강삼매경 등의 경전을 해설했으며 재가신도를 위해 정토신앙을 심어주었다”고 설명했다.
저 유명한 원효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은 이때 출발했다. 부처님은 듣는 사람들의 이해능력에 따라 법문을 달리 하는 ‘대기설법’을 하셨기에 똑같은 것을 다르게 얘기한 것들이 있었다. 이를 공부한 이들이 서로 자신이 옳다고 대립하는 것을 보고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속에 다루는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인 화쟁을 마련한 것이다.
김 교수는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하신 원효대사가 입안한 화쟁은 모두 67개가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서로 이는 동아시아 최고의 논서로 평가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금강삼매경론도 본래는 금강삼매경소라는 해설집이었으나 원효대사의 해설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중국학자들이 이 책은 대논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내용이니 ‘소’가 아니라 ‘론’으로 해야 한다고 한 것”이라며 “심지어 어느 학자는 금강삼매경도 원효대사가 썼을 것이라는 말도 한다”고 전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해골물 이야기는 후대의 드라마틱한 각색
젊은 날의 원효대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다.
무덤굴에서 대오각성한 원효대사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하고 유학을 철회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는데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13세기 자료로 신빙성은 덜 한 것이다.
현존하는 원효대사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대저술이다.
원효대사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며 세계불교사에 있어서도 으뜸가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