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대학 최고의 센터중 하나로 평가받던 농구스타가 LA의 노숙자(露宿者)로 전락한 사실이 알려져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일 A섹션 1면과 3면에 농구팬들의 추억속에 자리하는 한 스타의 충격적인 현실을 상세히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은 루이스 브라운(56). 신장 6피트 11인치(211cm)의 거한(巨漢)인 그는 70년대 전반기 농구명문 UNLV를 대학정상으로 자리매김시킨 대들보였다. 그러나 감독과의 갈등과 불운, 방황으로 NBA 진출에 실패하고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들과도 단절한 채 거리의 홈리스가 되어 낮에는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는 차량의 유리를 닦고 입에 풀칠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요즘 브라운은 대부분을 모빌주유소에서 일한다. 차에 개스를 넣는 동안 유리창을 닦아 주는 것이다. 퇴근시간이 되면 그는 산타모니카 남쪽 프로덕션 스튜디오들이 있는 길에 간다. 그곳엔 종이박스와 담요더미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11년째 살고 있다.
56세의 그는 영욕의 과거를 갖고 있다. 최고의 선수였으나 자신의 재능을 존중하지 않은 코치와의 갈등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독과 동료들의 얘기는 다르다. 그는 좀 성질이 급하고 남들과 화합하지 않는 선수였다. 그는 마약 전과도 있다. 가족들은 그가 UNLV 시절 코카인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누이동생 제리 브라운은 “약이 오빠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라스베가스 선 지는 브라운을 UNLV 역대 최고 선수 20위로 선정했다. 고교시절 감독이었던 조지 맥콱은 “그는 타고난 선수였다. 브라운은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고 회고했다.
그를 UNLV로 스카우트한 제리 타카니안 감독은 “루이스 브라운은 재능이 많았다. 그러나 잠재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NBA에서 13년을 활약한 레지 테우스는 브라운이 “내가 경험한 그 포지션의 선수중 누구보다 재능을 갖고 있던 선수였다”고 회상한다.
57세인 스테판 터너가 브라운을 만난 것은 지난해 7월 LA의 부자동네인 핸콘 팍에 사는 변호사인 그는 어느날 할리웃 근처에 있는 모빌주유소에서 자신의 벤츠차량 유리를 마른 걸레로 열심히 문지르는 건장한 남성이 어디선가 많이 본듯했다.
그가 루이스 브라운임을 안 터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교시절 자신과 경기를 하기도 했던 브라운은 고교시절 팀을 지역리그에서 3년간 정상에 이끈 최고의 스타였다. 그 시절 터너에게는 우상(偶像)같은 존재였다.
산타모니카의 선교교회 멤버이기도 한 터너는 브라운과의 만남을 하늘의 계시(啓示)로 보고있다. 6개월 전 그를 다시 찾아 “이봐 루이스! 난 믿을만한 사람이야. 당신과 내가 주유소에서 만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아. 우리 교회로 오라구”하고 말했다.
몇주가 지난 후 브라운은 병원에서 전화를 했다. 그는 터너에게 “난 심장이 안좋아. 죽기전에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말했다.
브라운은 캠튼에서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했다. 조니 와일스(48)는 “난 항상 브라운을 지켜봤다. 그는 엄청난 괴물이었다. 슛도 스피드도 좋았다”고 말했다. LA타임스는 1973년 그를 역대 CIF 남부섹션(C.I.F. Southern Section)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다.
브라운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경기를 거의 보러 가지 않았다. 브라운은 UNLV 리벨스에 진학하면서 더욱 상황이 악화됐다. 타카니안 감독과 불화를 빚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팀의 유일한 스타가 아니라는 것에 익숙치 않았기때문에 코치에 불만이 많았다.
팀 동료 로버트 스미스는 “루이스 브라운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운이 뛰던 4년간 리벨스는 102승16패의 전적을 마크했고 77년엔 NCAA ‘파이널 포’까지 올라갔다. 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 대회는 브라운에게 인생의 분수령(分水嶺)이었다.
리벨스는 4강전에서 노스캐롤라이나를 상대로 12점을 앞서고 있었다. 센터 래리 모펫이 코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자 감독은 브라운에게 나갈 것을 명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동료들은 감독의 말을 거부했다고 생각했지만 브라운은 코치의 말을 못들었다고 주장했다. 화가 난 감독은 다른 선수를 투입시켰고 결국 1점차로 패했다.
타카니안 감독은 “그때 브라운에게 무척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원래 브라운의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브라운은 당시 ‘하드웨이 에잇(Hardway Eight)’으로 불린 8명의 스타선수 중 NBA에 가지 못한 두명중 하나였다. 이후 81년 워싱턴 불리츠에서 10일짜리 계약을 하고 단지 두게임을 프로에서 뛰었을뿐이다.
그는 유럽으로 진출, 프랑스에서 프로선수를 시작했다.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해외에서 간헐적으로 뛰었고 CBA에서도 한 시즌을 활약했다. 42세였던 어느날 경기중 그는 치명적인 무릎부상을 당했다. 그것으로 선수생활은 끝이었다.
같이 생활하던 엄마가 여동생에게 떠난 후 브라운은 이따금 허드렛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생활비를 벌 수 없어 결국 거리로 나앉은 것이 홈리스 브라운의 시작이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브라운, “홈리스 생활에 만족한다”
브라운은 요즘 아침 6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모텔근처 인도에 쌓여있는 더미에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주워 한 장씩 읽는다. 하루의 대부분을 길에서 자거나 차 유리창을 닦고 주변 가게에서 주는 잡일들을 한다.
브라운의 동료들은 그를 가끔 길거리에서 본다. 테우스는 “이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더이상 선수가 아니다. 그는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브라운은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길에서 생활하는 것도 좋다. 내 인생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난 지금 평화롭다. 이것은 투덜대거나 소리쳐 울 스토리가 아니다.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봐 달라. 나도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브라운은 기자와 함께 거리를 걸으며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반갑게 포옹(抱擁)을 했다. 그들은 브라운에게 일거리와 돈과 음식을 줬다. 그가 필리핀에서 활약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필리핀 사람들도 많다. 한때 자신을 가게에서 내쫒으려고 했던 주인들은 이제 그를 환영한다. 프로덕션 스튜디오 매니저 존 피엔타는 “브라운은 우리 이웃들을 위한 경비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홈리스가 됐다는 소식은 가족들에게 고통이다. 누이동생 제리(55)는 기자에게 “난 오빠를 15년간 보지 못했다. 우리 교회가 오빠를 돕겠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난 오빠를 사랑한다. 엄마도 항상 오빠에 대해 얘기한다. 엄마는 매일 밤 오빠가 집 문을 두드리길 기도한다.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죽기 전에 오빠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