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래라는 말이 있다. 당그래는 고무래라고도 하는데 곡식을 그러모으고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모으는 데에 쓰는 ‘정(丁)’ 자 모양의 농기구를 말한다.
당그래 출판사. 사방에 흩어져 있는 지혜의 알곡을 그러모으고 펴는 출판사라는 뜻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참 정감넘치는 옥호(屋號)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올해로 창립된지 만 30돐을 맞은 당그래는 문학 인문 사회 경제 교양 실용서 등 각 분야의 양서들을 매년 20여종, 현재까지 350종의 책을 펴낸 종합출판사이다.
시와 수필 등 순수문학부터 미디어, 타로카드 전문서적까지 기실 독자들은 의식하지 못했어도 주변에 당그래가 출간한 책이 한 두권쯤 있을 법한 일이다. 인터넷 세상을 맞아 e-북이 출판계의 대체재로 기지개를 켜는 요즈음 당그래는 새로운 환경에 발맞출 준비를 하면서도 추억의 정취(情趣)가 물씬 풍기는 힘있는 종이책들을 연이어 출간(出刊)하고 있다.
당그래 출판사의 이춘호 대표는 당그래의 이름만큼이나 소탈하고 수수하다. 30여년을 한결같이 출판 외길을 걸은 이춘호 대표를 뉴스로가 만나보았다.
이 대표는 본래 기독교 월간지 <신앙계>의 편집장이었다. 81년 민들레교회로 잘 알려진 최완택 목사와의 인연으로 명상집 ‘아름다운 순간’을 출간, 출판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글과 관련된 직업이었지만 글을 쓰다보니 한계점같은게 느껴지더군요. 내 이름으로 책을 못내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책을 엮자, 그것이 출판을 하게 된 동기였어요.”
▲ 아름다운 순간 초판
당시 출판사 명은 합동기획이었고 당그래로 이름을 바꾼 것은 89년이었다. 주보(週報)를 엮어 만든 ‘아름다운 순간’은 화가 손상기(작고)의 독특한 표지그림이 어우러져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스테디 셀러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최완택 목사는 이 책이 출간된 2년후 신앙공동체 민들레 교회를 세워 직접 손글씨로 쓰는 주보 <민들레 이야기>로 꾸준히 펴내며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이춘호 대표는 “민들레 이야기는 16쪽의 소책자로 강정규 동화작가 이철수 판화가 등의 그림이 어우러진 것으로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 손상기 화백
‘아름다운 순간’은 구루병을 앓으며 무명의 화가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손상기 화백에게도 ‘세상과의 단절’, ‘소외’를 그린 작품세계가 극적으로 조명되는 계기도 되었다.
“책 출간으로 친해져 굴레방다리에 있는 화실에 자주 들렀어요. 손화백은 여수출신으로 원광대 회화과를 졸업한 재능있는 화가였는데 곱사등이라는 천형(天刑)으로 소외된 삶을 살았어요. 어느날 그분이 전시회를 열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더라구요. 그래서 그게 뭐 어렵겠냐, 그래서 알아보고 하다가 인사동 덕성여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것으로 유명세를 얻게 됐지요.”
‘한국의 로트레크’으로 불린 손상기 화백은 서른아홉에 요절(夭折)할 때까지 곱사등을 평생 짊어지고 살면서 ‘그림을 시처럼 시를 그림처럼’ 여기며 고뇌하는 서양화가였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다가 후반기 사회와 역사인식으로 확장되는 작품세계로 두차례의 유작전이 열리는 등 화단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손상기 화백은 2010년 문근영이 출연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통해 작품이 소개돼 또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천재작가의 발굴(發掘)이라는 뜻밖의 성과를 낳은 ‘아름다운 순간’이후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의 <황소 아저씨>와 시집 소설 등 문학서적을 꾸준히 출간한 이 대표는 당그래로 이름을 바꾼 이후 카드점술인 ‘타로(TARO) 시리즈’로 빅히트를 치게 된다. 20년이 넘도록 타로 시리즈는 당그래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당그래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는 시와 소설 등 순수문학 출간이 위축(萎縮)되지 않도록 2002년 순수문학 전문출판사 ‘새로운 눈’을 설립하게 된다. ‘지역이 곧 중심이다’라는 모토아래 지방이나 해외거주 필자, 기성작가들의 작품을 펴내고 있다.
김석규 시집 <적빈을 위하여> 김만수 시집 <종이눈썹> 백학기 시집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김백겸 시집 <북소리> 등이 바로 도서출판 ‘새로운 눈’을 통해 세상과 만난 작품들이다.
30여년간 다른 이들의 책을 낸 그에게 언젠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은건 없는지 질문을 던졌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취재해서 만들고 싶은 소망은 있습니다. 삶의 궤적만 봐도 저렇게 살았으면, 하는 꾸며진 책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 투영되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어요.”
노창현기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사진풍경이 있는 이야기 블로그 눈길
이춘호 대표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블로그 ‘때론,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다’에 이야기가 있는 사진들을 올리고 있다. 블로그에 들어가면 깜짝 놀랄만큼 아름답고 정밀한 이미지들과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당그래 출판사가 남산골 한옥마을 바로 옆에 있어 시간이 나는대로 남산 주변을 산책하며 변화하는 계절의 모습과 삶의 풍경들을 카메라 렌즈에 담고 있다.
그러면서 블로그 제목처럼 때론 소주 한두병과 고기를 들고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 세상을 만나기도 한다.
이 대표는 “하고 다니는 행색이 수상쩍었던 모양이죠? 언젠가는 간첩(間諜)으로 오인받아 곤욕을 치른 적도 있어요...허허..” 하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