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초비야는 산적이자 대장, 지역의 영웅이었고 멕시코 혁명으로 상징된다. 그러자 죽어서 그의 시신은 미궁속에 빠져 있다.
무기를 지닌 범죄자의 오른손 집게손가락(Trigger finger)은 그나마 찾기 좋은 장소에 있다. 멕시코 시우다드 수아레스와 접경지역인 텍사스 엘파소의 데이브 전당포의 진열대에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손톱도 남아 있는 이 손가락의 금일 판매가는 9500 달러라고 가게의 데이빗 델가딜로 씨는 말했다. 델가딜로 씨는 얼마전에 판초비야의 머리를 갖고 있다는 고객이 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멕시코의 풍운아 판초비야의 시신은 과연 어디 있을까. 월스트릿저널이 15일 판초비야 시신 미스테리를 조명했다.
예일대 두개골 뼈연구소, 과거 일리노이의 골상학(Phrenology) 연구소의 프리드리히 카츠 시카고대학 교수는 시신이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26년 누군가 판초비야의 시신을 파헤쳐 머리를 잘라갔기때문”이라는 것이다.
텍사스의 한 여자학교에 판초비야의 데드마스크가 수십년간 걸려 있다가 멕시코 치와와로 보내지기도 했다. 판초비야의 시신은 그가 저격당한 1923년 이달고 델 파르랄이라는 북부 타운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멕시코시티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패까지 걸린 판초비야의 또다른 무덤이 있다. 오랜 세월 미국과 멕시코에서 악명을 떨친 판초비야는 도로테오 아랑고에서 출생했으며 사람들이 ‘북부의 켄타우로스(반인반마)’로 불린 콧수염을 기른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를 위한 민요가 불려지고 그가 직접 출연한 할리우드 전기물도 있다. 판초비야의 생애는 지붕없는 닷지자동차 로드스터는 이달고 델 파르랄의 선인장 숲을 지날 때 수십정의 기관총을 들고 매복한 이들에 의해 벌집이 되고 말았다.
판초비야는 모두 9발을 맞았고 그중 4발이 머리를 가격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거라고 그들에게 말해!”라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최근 어느날 오후, 루벤 오소리오 마취과 전문의 출신 박사는 자신의 집에서 판초비야의 최후에 관한 미스테리에 몰두해 있었다. 그의 서가에는 오래된 전문과 판초비야의 시신을 본 사람들이 전하는 구전된 역사자료들이 있다.
오소리오 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지막 생애를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1976년 당시 루이스 에케베리아 멕시코 대통령은 판초비야의 유해를 발굴해 멕시코의 위대한 인물들이 묻혀 있는 멕시코판 알링턴국립묘지인 혁명사적지로 이장했다. 오소리오 박사는 “하지만 시신은 그곳에 없었다”고 말했다.
오소리오 박사의 말은 판초비야의 손녀인 과달루페 비야 씨의 증언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녀는 판초비야의 뼈를 수습한 오빠와 같이 살고 있다. 그녀는 인터뷰를 사양했지만 멕시코시티에서 단서가 되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 편지엔 “무덤을 발굴했을 때 일부 뼈들만 있었다”는 말로 시작됐다. 판초비야의 미망인인 아우스트레버타 렌테리아 씨가 그녀에게 누군가 시신을 발굴해 머리를 잘랐다는 말을 직접했다는 것이다. 렌테리아 씨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본래 무덤 옆에 목없는 시신을 따로 묻을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야 씨는 편지에서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렌테리아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기때문에 잘못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판초비야에 관한 또다른 설로 파르랄의 공식적인 연대기를 작성한 전직광부 아돌포 카라스코 씨의 이야기도 있다. 얼마전 꽃샘추위가 불던 날, 그는 시립묘지의 묘비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머리가 잘린 천사가 새겨진 대리석묘비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미친 짓을 한다. 우리가 남편을 마지막으로 옮긴 렌테리아 씨를 비난할 수 있을까?”하고 중얼거렸다.
카라스코 씨는 자신이 확보한 증거들을 끄집어냈다. 프란시스코 빌라라는 이름의 유해가 632호 무덤에서 나온 사진을 복사한 서류들이었다. 지금 이 무덤은 ‘피트 10’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돼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무덤을 가리키며 “대통령이 보낸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 때 프란시스코 빌라가 그곳에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럼 누구의 시신을 그날 멕시코시티에 옮겼다는 것인가? 카라스코 씨는 아무도 그 시신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작성한 서류들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1931년 3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이 암으로 투병하던 중 르랄에 왔다. 이 여성은 곧 사망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타운의 어딘가에 있는 판초빌라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시신도둑들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라스코 씨에 따르면 여성의 시신이 묘지로 옮겨져 판초비야의 시신처럼 보이도록 머리가 잘려졌다는 것이다.
632호 무덤을 파헤치자 시신이 있었다. 판초비야의 시신은 10호 무덤에 있었고 목없는 여성의 시신이 그의 자리에 있었다.
카라스코 씨는 “이것은 공식적인 역사에 따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1976년 그날 현장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레이스 조각이 있었고 여성의 보석도 있었다. 그날 판초비야의 미망인 사진이 있었다. 사진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그립다 그 얼굴...
바퀴벌레란 뜻의 라쿠카라차(La Cucaracha)의 유래는 15세기 스페인 민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작 이 노래가 유명해진 때는 20세기 초 멕시코의 전설적인 혁명가 판초 비야(Pancho Villa·1878∼1923) 시절 농민군 찬양가로 퍼지면서부터다.
얼마전 할리우드에서 조니 뎁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신작 '판초 비야의 일곱친구들과 여섯손가락의 여인들' 주연이 유력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영화는 판초 비야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제임스 카를로스 블레이크의 전기가 원작. 각본 작업은 이미 완료되었으나 조니 뎁의 바쁜 스케줄로 인해 촬영은 2011년부터나 시작될 전망이다. 쿠스트리차 감독에 따르면 극중 조니 뎁은 스페인어로 연기할 예정이라고.
글쎄 뎁의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멕시코의 산적대장을 미국 배우가, 그것도 스페인어로 하는게 어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