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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뉴욕한인영화감독 홍윤아 조명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0-10-19 (화) 11:28:32

AFP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감독 홍윤아 감독을 대대적으로 조명했다. AFP의 매튜 스캇 기자는 14일 ‘중국여배우, 고난의 할리우드 다큐’ 제하의 기사에서 홍윤아 감독의 최근작 ‘애나 메이 왕: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85년부터 뉴욕에서 독립영화제작을 하고 있는 홍윤아 감독은 소수계속의 또다른 소수계인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삶을 정교한 이미지로 엮어내는 작품들로 잘 알려졌다.

애나 메이 왕은 1920년대와 30년대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아시아계 스타이다. 그녀의 생애를 다룬 다큐 영화가 최근 부산국제영화제(PIFF)에 공식초청되면서 AFP의 주목(注目)을 받게 됐다.

AFP는 홍 감독이 애나 메이 왕의 생애를 다루게 된 인연(因緣)은 한 장의 사진(寫眞)으로 시작됐다며 1922년 촬영한 17세의 앳된 여성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www.wikipedia.com

“사진속의 그녀는 너무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어요. 저런 여자가 어떻게 스타가 되었지? 속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그녀 눈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어요.”

홍 감독은 애나 황이 사후 50년이 지났지만 어떤 아시아 여배우도 그녀가 한 것을 이루지 못했고 아시아 여배우들이 갖는 할리우드의 ‘유리천정’이 현재진행으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AFP는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15회 부산영화제(PIFF)에 초청된 ‘애나 메이 왕’은 그녀가 겪은 역사의 굴곡처럼 매혹적이면서 가슴에 사무치는 통절함을 안겨준다”고 묘사했다.

1905년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 세탁소 집의 딸로 태어난 애나 왕의 본명은 황류상(黃柳霜). 열일곱살에 무성영화 ‘바다의 종’을 통해 데뷔를 한 것을 시작으로 20년간 50편에서 중심적인 배역(配役)을 맡았다.

그녀는 ‘바그다드의 도적’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상하이 익스프레스’의 말린 디트리히에 필적(匹敵)하는 배우로 명성을 누렸고 1930년대는 유럽에 진출, 영화와 가수로 재능을 뽐냈다.

 

▲ '상하이익스프레스'에서 말린 디트리히와 함께 <이하 www.wikipedia.com>

그러나 애나 왕의 화려한 연기인생 이면(裏面)에는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주의 정책에 시달리는 아픔이 있었다. 홍 감독은 “2차대전말까지 영화와 TV시리즈를 넘나들며 폭넓은 활동을 벌였지만 할리우드의 ‘프로덕션 코드’에 따라 악녀나 요부와 같은 고정된 배역을 맡도록 강제됐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프로덕션 코드’는 공공연한 성적 차별과 동양인역을 맡은 배우들이 얼굴에 노란색칠을 하는 등 1930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진 할리우드의 정책을 말한다.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질곡(桎梏)의 시대를 헤쳐가던 애나 왕은 1935년 적지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펄벅의 퓰리처상 수상작 ‘대지’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에 주연인 농부의 아내 오-란역을 따내기 위해 맹렬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작사 MGM이 ‘프로덕션 코드’에 따라 남자배역을 폴 무니에게 맡기면서 희망도 사그라들었다. 대신 주어진 첩의 배역을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 폴 무니가 중국인역으로 분장한 모습 www.wikipdedia.com

AFP는 이 다큐작품에서 애나 왕 역을 맡은 배우가 왜 아시안들은 항상 ‘살인자’나 ‘배신자’같은 악한 역을 맡는지 묻는 장면을 꼽으며 홍 감독의 뼈있는 말을 전했다.

“애나 왕은 배우활동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어요. 결혼도 가족도 제쳐두고 스타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할리우드는 아시아 여성에게 주역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중이 적은 아시아 관객을 위해 제작사들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해요.”

‘애나 메이 왕~’은 홍 감독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된 사람들과의 다양한 인터뷰가 담긴 8년간의 노작(勞作)이라고 AFP는 평가했다. 애나 왕의 과거 작품과 친필서한, 인터뷰 등 귀한 자료들, 특히 그녀와 30년 넘게 교류하며 많은 사진을 촬영한 사진작가 칼 밴 벡텐의 인터뷰도 눈여겨 볼만하다.

 

▲ 칼 벡텐의 사진 1935년(왼쪽)과 1939년의 모습이다 www.wikipedia.com

아시안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벽을 뛰어넘은 선구적(先驅的) 존재 애나 메이 왕.

홍 감독의 작품으로 타계 반세기만에 그녀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녀는 용감했어요.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스스로의 자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할리우드의 고정관념과 싸운 애나 메이 왕

애나 메이 왕은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조부는 1853년 중국 광동성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금광이 있던 미시건 힐즈에서 가게 두 개를 운영한 상인이었다.

중국계 3세인 애나 왕은 어려서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극장에 가느라 학교도 빠지고 점심값으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니 말이다.

극장가를 기웃대며 아홉 살 때 얻은 별명은 ‘CCC(Curious Chinese Child 호기심많은 중국아이)’였다. 열한 살 때부터 애나 메이 왕이라는 예명으로 단역을 맡기 시작했고 1921년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학교(LA하이스쿨)도 그만뒀다.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을 맡은 영화는 1922년 출연한 무성영화 ‘바다의 종(The Toll of Sea 사진)’이었다. 그녀의 연기력은 뉴욕타임스의 호평을 받았다.

 

www.wikipedia.com

1924년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출연한 ‘바그다드의 도적’을 통해 그녀는 패션 아이콘이 되었고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아시아계 여배우라는 현실이 늘 그녀에겐 걸림돌이었다.

1929년 ‘피카딜리’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정형화(定型化)된 역할만을 제공하는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1930년대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 ‘용의 딸’(1931년) ‘상하이의 딸’(1937년)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2차대전 기간동안 활동이 저조했던 애나 왕은 1950년대 자신의 이름을 건 TV시리즈로 재기에 성공하며 아시아계 배우로 첫 TV시리즈의 기록도 세웠다.

1961년 56세의 나이로 타계(他界)한 왕은 탄생 100년을 맞은 2005년이후 그녀의 삶을 조명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재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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