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沈黙)은 설득력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언어과잉의 시대. 말과 글은 꼭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지만 매일 홍수처럼 범람(汎濫)하는 언어들로 인해 현대인은 지치고 쉽게 상처를 받는다.
언어가 아닌 몸짓과 소리의 파장(波長)을 통해 침묵의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비주얼아티스트이자 독립영화감독 백평훈씨가 마련한 ‘바디로그(Body-logue)’ 전시회가 주목을 받는 이유다.
지난 12일부터 롱아일랜드 시티의 ‘오픈 스페이스(Open Space) 갤러리에서 전시중인 ‘바디로그‘는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네모난 형태의 결코 크지 않은 공간엔 스무점 남짓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영상과 사진을 이용한 다채로운 설치예술 작품들이 어떤 전시회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갤러리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끄는 것은 정면 벽에 가로 3m, 세로 2m 크기로 투사되는 영상이다.
푸르름과 보랏빛 연홍색의 흐릿한 파스톤컬러가 교차하면서 파장의 그래프가 간단없이 그려진다. 산처럼 솟아올랐다가 계곡처럼 침잠(沈潛)하는, 때로는 물결같은 잔영들, 화면을 가로로 분할하며 문득, 고동치는 심장이 멎은듯한 짧은 정지선들은 격렬한 빛의 파동을 순식간에 잠재운다.
그 앞에 마치 묵언(黙言)의 수행자처럼 서있는 방독마스크는 이 작품의 시사점을 말해준다. 단지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투사되는 빛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자가 영상과 결합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정교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은 ‘컬러 오케스트라(1분48초 2008년)’. 백평훈 감독은 “말은 한마디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부드럽게 감쌀 수도 있다. 같은 말로 높낮이에 따라 다른 의도를 줄 수 있다. 이러한 파동의 그래프를 보고 느끼는 침묵의 대화가 우리는 필요하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해석의 몫은 정형화되지 않는다. 보고 느끼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갤러리 왼편에 걸린 아홉점의 흑백사진들의 제목도 당연히 ‘무제(Untitlied)’이다. 그런데 오른편 벽에 걸린 포스터 크기의 두점을 포함, 사진들은 공통점이 있다.
무용(Dance)이었다. 몸을 통한 의사표현으로 무용만큼 확실한게 어디 있는가. 전시회의 제목인 ‘바디로그’가 몸(Body)과 대화(Dialogue)의 합성어라는 점에서 몸의 움직임을 통해 진실된 ‘소통’을 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출입구 벽에 걸린 두점의 컬러작품, ‘Andante’와 ‘Apart A Part’ 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현대무용의 장면을 담은 이 작품들 앞에는 헤드폰이 걸려 있다. 헤드폰을 쓰자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이자 무용가인 김기화 씨는 “무용가가 공연한 무대에서 나온 음악들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지만 무용가가 표현하는 육체의 언어를 음악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동영상 소품 작품들도 주목
‘바디로그’엔 숨어있는 작품을 찾는 즐거움도 누린다. 구태여 숨긴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스쳐버릴 수도 있다.
왼편 사진들 아래 놓인 두 개의 작은 상자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비디오영상들이 나오고 있다. 역시 육체의 몸짓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방명록이 놓인 카운터에 있는 모니터는 그냥 사무기기가 아니다. 일곱 개의 과일을 육체의 언어로 형상화한 단편영화 ‘Seven Fruits’가 상영되는 가운데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선 배우 홍민기와 김기화 큐레이터의 ‘연기’도 볼 수 있다. 사과 등 몇 개의 과일 모형과 모니터의 애플 로고도 작품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갤러리 입구 창에 화분사이에 장식처럼 붙은 모니터. 스마트폰만한 크기의 화면에서도 꽃의 이미지가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백평훈 감독은 아리랑블루스 등 큰 반향(反響)을 일으킨 단편영화들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이지만 비주얼 아티스트로서도 여러차례 그룹전에 참여했다. 그의 또다른 설치작품 하나가 뉴욕의 그룹전 ‘WOMB’에 전시중이기도 하다.
생애 첫 개인전을 갖게 된 백평훈 감독은 “수많은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정직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자신의 몸을 표현도구로 하는 무용가의 몸짓을 사진작품의 대상으로 한 것은 그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평론가 한동신 오픈워크 대표는 “백평훈 감독은 뉴욕에서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전공하고 순수미술과 멀티미디어의 관계를 일관되게 실험해 왔다”면서 “인간의 ‘순수’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설치작업을 하는 그이가 이번 전시회에서 창의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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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로그 (Body-logue)' 전시회는 오는 25일까지 계속된다. OPEN SPACE Long Island City Art Center. 44-02 23rd St, Studio 101 Long Island City, NY 11101 문의 718-392-3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