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중위의 맹렬한 기상과 영웅적 활약이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소대원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심어주었다.’ <LA타임스>
‘스톤중위는 소대원들을 참호속에서 방어토록 하고 홀로 일어나 기관총을 움켜쥐고 적의 가공할 화력에 응사했다.’ <NY타임스>
‘명예의 메달(Medal of Honor)’은 미국이 전쟁영웅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무공훈장(武功勳章)이다. 현재 이 훈장을 받은 생존인물은 미 전역에 80명에 불과하다. 한국전쟁의 영웅 제임스 스톤 (James L. Stone) 중령이 지난 9일 89세를 일기로 영면(永眠)에 들었다.

1951년 11월 21일에 치른 임진강 유역의 석고개전투는 지금도 미국전투사에 회자될만큼 전설적인 무용담이다. 당시 28세의 중위였던 스톤의 소대원은 48명. 그날 밤 무려 800명의 중공군이 물밀듯 밀려왔다. 열여섯배가 넘는 중공군의 기습에도 그의 소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스톤 중위는 홀로 단 한 대의 기관총을 들고 신출귀몰(神出鬼沒)하듯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중공군에 맞섰다. 놀라운 결사항전이었다. 다음날 지원군은 수백명의 중공군 시신(屍身)을 발견했다. 아군 소대원은 절반이 전사했고 나머지도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스톤 중위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전투에서 목과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중공군에 생포돼 2년간 지옥같은 포로생활을 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명예의 메달’이 수여된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중 대표적인 전쟁영웅이다.

그의 부음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생전 업적을 기리는 기사를 출고한 가운데 한국전참전용사 디지털기념관(www.kwvdm.org)의 한종우 이사장이 스톤 중령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해 화제가 되고 있다.
미 전역의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그는 지난 10월20일 텍사스 댈라스에서 스톤 중령을 인터뷰했다.

한종우 이사장은 14일 “그동안 여러 전쟁영웅들을 만나봤지만 스톤중령의 무용담(武勇談)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 전투를 치른 전쟁영웅의 현재 모습이 너무도 맑은 얼굴이 인상적이었고 북한에 대해 더욱더 잘해주고 경제를 통해 통일해야 한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한종우 이사장은 휴전 60주년을 맞는 내년 7월 27일 ‘참전용사 손자손녀 클럽’을 발족시킬 것을 제안하여 참전용사협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고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그는 “내년 7월27일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정전 60주년 행사에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이 소장한 참전용사 인터뷰와 수집한 사진 등의 각종 역사적 자료를 공부한 참전용사 자손 20명을 초청해 4일간의 워크숍을 개최할 것을 선언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스톤 중령을 인터뷰하게 된 계기는.
“10월 텍사스 주에서 참전용사들을 만나 인터뷰하는데 이들이 한결같이 스톤 중령 이름을 거론했다. 89세의 나이로 지병이 겹쳐 힘든 투병 중이라는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디지털 기념관의 귀중한 기록이 될 것이라는 권유에 간곡하게 인터뷰를 청했다. 다행히 텍사스 주 알링턴의 215지부 참전용사들이 피크닉을 하던 10월20일 오후 스톤 중령이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만나게 됐다.”
-병중이라던데 첫 인상이 어떠했나.
“대의명분을 위해 극한 상황을 경험하고 원칙의 삶을 산 사람들의 마지막 얼굴은 갓 태어났을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가 보다. 병마(病魔)로 힘들었을텐데도 부인 마리 루(Mary Lou) 여사와 함께 온화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을 만들어 가면서 말로만 듣던 전쟁영웅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스톤 중령의 경우는 정말 전설적이다. 1951년 11월 임진강 유역의 석고개에서 48명의 소대원으로 중공군 2개대대 800여명을 상대로 백병전을 치러 고지를 사수했다. 그 전투로 오른쪽 다리와 목 바로 밑을 관통하는 부상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2년간 포로생활도 했다고 들었다.
“석고개 전투에서 부상후 중공군에게 잡힌 그는 압록강 하구의 벽동에 세워진 중공군 포로 수용소에 수용됐다. 휴전되고도 두달이 지난 1953년 9월, 22개월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방에서 약 14명이 한 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불기하나 없는 바닥에서 칼 잠을 자는 등 지옥같은 포로생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하나님과 밥’이었다고 말했다. 일반병 포로들은 밀기울로 만든 조그만 주먹밥 한끼로 때울 때, 한 끼지만 장교여서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그리도 좋았던지, 그 얘기를 하며 빙그레 미소짓더라.”
-오늘의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든가.
“대부분의 참전용사가 그렇듯이 그에게서 중국과 북한에 대한 적의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톤 중령은 마오쩌뚱이 휴전허가를 위해 스탈린을 졸랐지만 스탈린이 포기하지 않아, 그가 죽은 1953년 4월이 지나서야 휴전협정이 이뤄졌다고 했다, ‘중국도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거지’라면서 그저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고 인터뷰 내내 반복했다. 그에게 북한과 어떻게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대뜸 ‘상대에게 좀더 잘 해주라(Be nicer)’는 말을 했다. 원하는 것을 주고 무역을 하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의 대결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경험한 그에게서 이데올로기적 앙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모두 살기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현실주의자의 진솔한 고백(告白)으로 들렸다.”
-스톤중령에게 보낸 마지막 선물이 있다던데.
“디지털 기념관은 그동안 수집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