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를 존엄사(尊嚴死)시키려는 병원과 이를 막기위해 법정투쟁을 벌인 가족.
영화에서나 봄직한 믿기힘든 존엄사 논란이 극적인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뉴욕의 한 병원에서 한인여성환자를 상대로 벌어진 이야기는 뉴욕타임스와 ABC방송 등 미국의 주류언론이 대대적으로 다루는 등 지난 가을 한인사회의 뜨거운 이슈였다.

존엄사 위기에 처했던 이성은씨(28 미국명 그레이스 이)가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21일 자택으로 마침내 퇴원했다. 길고도 피말리는 여정이었다. 뉴욕의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근무하던 이성은씨는 지난해 가을 뉴욕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훈련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노스쇼어 병원(North Shore Hospital)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수술후 1년간의 투병 끝에 회복했으나 지난 9월 3일 집에서 실신, 다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고통스런 치료에 힘들어하던 이씨는 병원에 존엄사를 택했고 병원도 당사자의 판단을 존중, 이를 수용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아버지 이만호 목사 등 가족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결사 반대했고 존엄사를 강행하려는 병원과 가족간의 법정소송까지 벌어졌다. 지난 9월 28일 병원측은 존엄사 집행허가판결을 받았으나 성은씨가 가족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그러나 병원측이 법원판결을 이행하려 하자 가족들은 ‘사실상의 안락사’라고 판단, 항소를 하는 한편, 한인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가족들은 지난달 4일 기자회견을 통해 “딸이 살고 싶어하는데도 병원이 듣지 않고 있다. 퇴원을 원하는 데도 병원에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증거자료로 사촌오빠가 “언제 퇴원하고 싶냐”고 묻자 성은씨가 “지금”이라고 답하고, “의료대리인으로 아버지를 내세우겠냐”고 묻자 “그렇다”라고 밝히는 동영상도 제출했다. 결국 같은 달 10일 항소재판에서 성은씨가 요양시설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공식확인, 존엄사 강행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은씨의 퇴원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병원측은 환자의 상태를 들어 퇴원을 거절했고 치료병실이 아닌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들이 있는 고통완화병실(PCU)로 이송했다. 가족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며 퇴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병원 측의 반대로 또다시 난항에 부딛쳤다.
아버지 이만호 목사는 지난달 16일 인터뷰에서 “컨디션이 좋아졌던 성은이가 병원의 횡포로 점차 힘들어지고 있다”면서 “치료목적이 아닌 고통완화병동으로 옮길때도 전혀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모르핀 등에 의한 심한 중독 증상으로 위험한 순간이 여러차례 있었다”고 답답해 했다.
길었던 줄다리기는 병원측이 뉴욕 더글라스톤에 위치한 자택을 방문조사하고 홈케어 회사를 주선하면서 마침표를 맺을 수 있었다.

병원 측과 소통하며 이성은 씨를 돕고 있는 제이 김 씨는 “고통완화 병실에서 살아 나온 이는 성은씨 밖에 없다.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이라며, “진통제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는만큼 이제 안정된 홈케어를 통해 곧 회복될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민병옥특파원 bomin@newsroh.com

<꼬리뉴스>
한인사회 존엄사 반대 시위도
지난달 10일 항소재판이 열릴 때 법원 밖에서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인들이 모여 존엄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결국 법원은 이날 이씨가 치료 중단과 죽음을 불러올 수 있는 인공호흡기 제거를 원한다는 의사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를 허락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건을 가족의 결정을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워싱턴대학 랜던 커티스 교수는 "환자를 단독 결정자로 보는 의료진과 가족의 결정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충돌하는 사례는 다문화 사회에서 점점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