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한인사회’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재외국민들, 넓게는 한겨레 배달의 동포들이 지구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코리아의 가장 큰 자산이 이렇게 흩어져 있는 한인들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경은 지구촌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누빈 한인 네트워크로 확장되고 있다.
한인회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는 전 세계 114개국 700여개에 달한다. 허다한 한인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인회는 어디일까. 주관적인 판단이 작용하겠지만 뉴욕한인회가 가장 윗줄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규모와 역사성 때문이다.
뉴욕한인회의 정식 명칭은 ‘대뉴욕지구한인회(The Korean American Association of Greater New York)’이다. 뉴욕시는 물론, 북부와 동부 뉴욕주 일원, 뉴저지, 코네티컷 주 일부까지 아우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50만 한인들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대뉴욕지구한인회를 이끌고 갈 수장(首長)이 최근 탄생했다. 제32대 민승기 뉴욕한인회장(58)이다. 지난 11일 정기총회를 통해 당선이 확정된 그는 오는 5월 출범하는 33대 집행부 구성을 위해 밤낮없이 바쁘게 뛰고 있다.

지난 82년 만 스물일곱의 나이에 미국에 온 그는 1년간의 워싱턴 DC 생활을 마치고 83년 뉴욕에 정착했다. 올해로 뉴욕생활 30년을 꽉 채웠다. 모국서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은 세월을 뉴욕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만큼 뉴욕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더없이 크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위대한 뉴욕한인사회의 건설’을 내건 것도 막연한 슬로건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지금의 뉴욕한인회가 정식 창립된 것은 1960년이지만 기실 원류(源流)는 무려 92년전을 거슬러 올라간 1921년 뉴욕 일원 거류민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발족한 한인회가 시초다.
미국 최대의 도시이자 세계 최대의 금융 문화 국제정치의 중심인 뉴욕을 커버하다보니 자연 뉴욕한인회의 존재감도 커졌다. 2004년 세계한인회장 대회가 열렸을 때 당시 김기철 뉴욕한인회장이 초대 회장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준비된 후보’라는 말을 한다. 민승기 회장에게 그 말은 더없이 어울린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단독 출마해 당선됐다. 혹자는 너무 쉽게 당선됐다며 운이 좋다고 하지만 경쟁자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압도적인’ 후보였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2년간 뉴욕경제인협회장을 역임하고 2011년 제31대 뉴욕한인회 전반기 이사장을 지냈다. 그가 한인회장 선거를 준비한 것은 이사장 직위를 내려놓은 직후인 1년전이다.
일찌감치 조직을 구성한 채 한인사회 현장을 구석구석 누비는 그를 보고 잠재 후보들은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 2009년 한인회장 선거는 역대 최고의 불꽃튀는 경쟁이었다.
뉴욕타임스가 거의 한 면을 털어 한인회장선거를 ‘한인타운 시장선거’로 비유하는 등 대서특필(大書特筆)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만큼 뉴욕한인회장은 대민봉사정신과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성공한 사업가들에게는 한번쯤 밟고 싶은 매력적인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민승기 후보가 지난 2월 11일 대대적인 ‘후원의 밤’을 열어 출마를 공식화 한 이후 줄곧 ‘원맨쇼’였다. 잠재후보들은 출마를 포기했고 후보등록, 연설회, 토론회 등을 홀로 치르며 뉴욕한인회장에 ‘무혈입성(無血入城)’에 성공했다.


그는 한인회장을 왜 하려고 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지난 1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한 뉴욕한인사회에 걸맞는 한인회의 위상을 구축해보겠다는 야심때문이다. 그를 위해선 한인회가 구조적인 문제해결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뉴욕한인회는 정말 엄청난 조직이다. 50만의 힘을 가졌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 50만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바다처럼 넓다. 2년 임기동안 한인회장 혼자서는 죽었다깨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인회장이 바뀌어도 훈련된 전문가집단이 끌고 갈 수 있는 연속성 있는 한인회의 기초를 닦기 위해 한인회장에 나오게 됐다.”

마치 대통령중심제와 같은 현재의 한인회장을 일정부분 내각책임제화 하는 것이 그가 구상하는 골자(骨子)다. 이를 위해 그는 최근 한인회내 회칙개정위원회로 하여금 이사진 임기를 현행 1년에서 3년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회장이 교체되면 이사진도 전원 교체되는 구태(舊態)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혁신안은 일단 임기 6년의 특별위원회 구성이라는 중재안으로 조정됐지만 임기중 이사진의 권한 강화는 반드시 해낼 생각이다. 민승기 차기회장은 “이사진이 회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회장이 이사진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50만 한인동포들을 이끌고 가겠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신임회장이 들어와도 이사진 숫자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기 때문에 고립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뉴욕에 온후 사업에 전념했던 그가 한인사회의 단체일을 하게 된 것은 2000년 경제인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사업체인 ‘스페이스 에이지’가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서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에 미국에 와서 어느덧 마흔을 넘겼는데 사회적 연령은 여전히 스물일곱에 멈춰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부딪치면서 정서적 연령을 내 나이로 돌려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경제인협회 일을 하면서 김기철 회장 시절 뉴욕한인회 총무이사도 맡고 이경로 회장 때에는 부이사장의 직책도 맡으며 외연(外延)을 넓혔다. “사실 사업만 할때는 한인회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것이 봉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뉴욕한인회 일을 실제로 하면서부터다.”
2009년 경제인협회장에 당선되면서 그는 우선 규모확장에 주력했다. 70~80년대의 초기 모습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협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회원가입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2년 임기가 지났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위해 연임에 도전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지나친 ‘만심(慢心)’이 있었던듯 그는 불과두표 차이로 재선에 실패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재선에 실패한 것이 오늘날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된 계기가 됐다.
그는 “경제인협회장을 할때만 해도 뉴욕한인회장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재선하면 할 일이 참 많았기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그를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그해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된 한창연 회장으로부터 전반기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흔쾌히 응했다.

뉴욕한인회를 좀더 가까이 하면서 문제점도 보이기 시작했단다. “한인회를 끌고나갈 인프라가 무엇보다 없었다. 대외위상은 높아지고 있는데 결집된 힘이 부족했다. 50만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사회를 회장의 뜻을 반영하는 거수기(擧手機) 집단이 아니라 회장이 없어도 끌고 갈 수 있는 전문가집단이 되도록 할 참이다. 이사진을 72명 이상을 둘 수 있도록 한 회칙에 의거, 세자리수의 이사진을 구성할 생각이지만 30명 정도로 구성된 상임이사회가 핵심이 되어 일하는 이사회가 되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한인회 웹사이트를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활성화하고 시의성있는 실무세미나도 개최하며 맨해튼 32가 한인상권과 유학생그룹의 현안들을 논의하는 ‘경청회’도 여는 등 이사회가 보람을 갖고 할 일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는 것이다.
“뉴욕한인사회는 자기 주장과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것을 듣고 실천적 대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나온 10년보다도 앞으로 10년간 뉴욕한인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속도에 맞출 수 있는 한인회의 기초를 닦아야한다.”
SNS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한인인구의 10%인 5만명에게 매주 한차례 e뉴스를 발송해 이들은 한인사회의 핵심 네트워크로 구축한다는 생각이다. 친목 때문에 만나는 단체 구성보다는 한인사회의 욕구충족을 위한 진정한 봉사개념이 장착(裝着)되야 한다고 믿는 그는 “덕망있는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통해 동포사회의 신뢰를 쌓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주류정치권과 핫라인 구축“
그의 구상중 진짜 눈길을 끄는 것은 미 주류사회, 특히 동포사회의 삶에 직결되는 정치권과의 핫라인 연결이다. 뉴욕시장실을 비롯, 맨해튼 퀸즈 브롱스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 등 5개 보로장의 연락관 구성에 합의해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순발력있게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한인회가 가만 있어선 안된다. 꼭 시장이나 보로장을 만나야 해결되는게 아니다. 상호간의 연락책임자만 있어도 가능하다. 문제가 풀릴 때마다 당사자는 물론, 상급 책임자에게도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면 자연스럽게 인사고과에 도움이 된다. 그게 바로 정치역학이다.”
한인회장을 준비하는 동안 그에겐 큰 아픔이 있었다. 어머니 김경자 여사가 지난해 10월 별세한 것이다. 3남1녀의 맏아들로 어머님을 미국에 초청하고 20년을 모시고 살았던 그로선 그야말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슬픔이었다.

그는 “어머니 연세가 여든셋이었지만 정말 건강하셨다. 디스크 수술을 하고 요양원에서 며칠 가료중이었는데 선거준비로 너무 바빠서 병원에 들르지 못한 날 그만 급작스런 심장쇼크가 왔다.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불효를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큰 충격에 한인회장 선거를 포기할 생각도 했지만 가족과 주위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민승기 차기회장은 부인 제시카 민씨와의 사이에 마틴(26) 스테이시(24) 그레이스(21) 3남매를 두었다. 아내가 20년된 사업체 스페이스 에이지를 책임지게 되면서 8년전부터는 커스템 쥬얼리를 온라인도매로 공급하는 비즈니스를 또 하나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하는 동안 여러 차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을만큼 그는 바쁜 비즈니스맨이기도 했다. 민 차기회장은 “한인회장의 중책을 맡아 더 바빠지긴 하겠지만 사업체도 안정된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며 ‘위대한 한인회’의 초석(礎石)을 다지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교회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