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국대표팀으로 나갈 수 없다.”
2012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영국 축구계가 내홍(內訌)을 겪고 있다. 대표팀을 구성하려하지만 대표차출을 거부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팀의 손익계산서에 따른 거부가 아니다. 자칫 대표팀 가담이 일종의 매국(賣國) 행위로 치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가 20일 영국축구계의 복잡미묘한 갈등을 1면 기사로 보도해 관심이 일고 있다. 영국은 올림픽에 통합영국(Great Britain)의 이름으로 출전한다. 통합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를 포괄하는 명칭이다.
이들 지역은 오랜 대결과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날 정치적 외교적으로 한 나라지만 사법기구나 정치조직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다. 축구의 경우 각각의 연맹이 존재하고 월드컵과 유럽선수권 등에는 독립된 팀으로 출전하고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선 통합 대표팀만이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겪고 있는 갈등의 핵심이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 축구연맹은 통합영국(GB)팀에 소속 선수들이 차출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영국올림픽위원회가 지난 6월 2012년 ‘통합영국(GB)’이라는 타이틀로 남녀올림픽 축구대표팀 선발에 이들 3개 연맹이 협조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들 연맹의 입장은 다르다. 스코틀랜드 연맹의 스튜어트 리건 CEO는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GB팀에 참여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대해 영국축구협회의 스캇 필드 대변인은 “영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통합대표팀을 못만든다면 캐나다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지국 아이스하키대표팀이 못나가는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현대 축구가 탄생한 것은 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영제국의 영향력으로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에서 영국은 반세기가 넘게 남자대표팀이 구성되지 못했다. 여자대표팀의 경우 1996년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여자축구가 채택됐지만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올림픽 통합대표팀 논쟁은 의견이 분분하다. 평소 축구연맹을 ‘돼지처럼 무식한 위원회’라고 조롱하는 데일리 메일의 데스 켈리 컬럼니스트는 “어떻게 된 축구연맹이 최고의 재능을 갖춘 어린 선수들이 평생 한번 뛸 수 있는 올림픽에 뛰지 못하게 하느냐?”고 비난하고 있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여자축구 득점기록을 갖고 있는 쥴리 플리팅같은 선수들은 지난 6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난 뼛속까지 스코틀랜드 선수”라며 “GB소속으로 뛰어서 미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프리미러리그 아스날에서 활약하는 웨일스 대표팀 주장 애런 램지와 토튼햄의 개러스 베일은 올림픽에서 뛰는 것에 관심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전 잉글랜드의 스타 데이빗 베컴도 과거 올림픽 출전에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스코틀랜드의 스타선수 킴 리틀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체 왜 올림픽에서 뛰지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통합영국팀으로 뛰는 인센티브 한가지는 비잉글랜드 대표팀들이 슬픈 국제 기록 한가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웨일스는 전력이 약해 1958년 월드컵에 단 한차례 출전한바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1967년 전년도 월드컵에서 우승한 잉글랜드를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격파한 향수를 갖고 있지만 98년 월드컵이후 본선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프로리그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유럽 남미의 스타 선수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많은 축구팬들은 사실 올림픽보다 프리미어리그와 유럽 리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만큼 올림픽 축구경기 티켓은 판매가 부진한 편이다. 올림픽 축구는 3명의 와일드카드 선수외에는 만23세 이하로 구성하도록 제한된다. 여자대회는 월드컵에 준하는 대접을 받지만 흥행성에 있어서 남자에 비할 바는 못된다.
영국올림픽위원회의 대릴 사이벨 대변인은 “미국이 96애틀랜타 올림픽과 99월드컵을 통해 붐조성이 된 것처럼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영국 여자축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같은 상황은 단지 불편할뿐이다. 레이먼도 보일 글래스고 대학 문화정책리서치센터 교수는 “스코틀랜드의 축구팬들은 ‘잉글랜드=그레이트 브리튼(통합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크레이그 브라운 전 스코틀랜드 감독(현 애버딘 감독)이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난 통합영국팀으로 이기는 것보다 스코틀랜드팀으로 패하는 것을 원한다”는 말에 공감하고 있다.
웨일스의 대표팀 골키퍼 네빌 사우탈은 최근 기자들에게 웨일스가 아닌 팀을 지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국기를 높이 들어야 하는 특별한 순간이다. 만약 GB팀이 축구에서 우승할 경우 우리는 어떤 국기를 들겠는가. 유니온잭? 그건 우리 국기가 아니다. 우리 국기는 드래곤이다.”
뉴욕=노정훈특파원 jungroh8909@hanmail.net
<꼬리뉴스>
올림픽 통합팀 출전이 월드컵의 전례될까 두려워하기도
이들 연맹이 통합팀을 꺼리는 또다른 이유는 올림픽에 대표팀이 나갈 경우 향후 월드컵이나 유럽선수권과 같은 이벤트에도 통합 대표팀이 출전하는 전례가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자칫 지금까지 유지된 기득권(旣得權)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FIFA는 월드컵에 이들 4개 연맹이 독자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만큼 경쟁이 많아지기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외부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웨일스와 북아일랜드는 각각의 사법기구가 있다 스코틀랜드는 의회가 따로 있다. 다수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라이벌의식은 아주 뿌리가 깊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나오면 상대팀을 무조건 응원할 정도다. 물론 이들 연맹이 소속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고 있다.
클래어 보델 스코틀랜드연맹 대변인은 “선수들은 스코틀랜드 팬들이 GB팀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