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싫어..시~일탄 말이야..”
고개를 외로 꼰채 장상준씨는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 어눌했지만 가슴 저 깊은 심연(深淵)에서 분출되는 외침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보행보조기에 의지한채 테이블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소녀가 보내온 카드를 읽었다. 눈가엔 촉촉이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거실을 급조한 간이(簡易)무대(舞臺). 옹색한 조명(照明). 그러나 배우들은 혼신의 연기를 했고 20여명의 관객들은 해일같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극(聖劇)이었다.

2012년이 저물어가는 29일 뉴욕 플러싱에선 한인장애우들의 기적같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고 대사 한줄 외우기 힘든 장애우들이 난생 처음 연극이란 것을 해본 것이다.



장애인사역단체인 뉴욕밀알선교단(단장 김자송)의 장애인들이 뉴아라봉(뉴욕의 아름다운 라면봉사)과 함께 올린 ‘100번째 프로포즈’는 한 사형수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소녀의 순수한 마음에 감화되어 회개(悔改)와 사랑을 하게 되는 성극이다.

밀알선교단의 정창모 집사와 뉴아라봉 대표인 연극배우 김성아씨가 두달전 장애인들의 연극을 해보기로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밀알선교단의 장애인들은 단순장애가 아니라 거동이 어렵거나 일상 생활이 힘든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기때문이었다.


지난해 7월 발족된 뉴아라봉은 밀알선교단의 장애우들과 매달 한 차례 사회적응훈련과 봉사를 겸한 라면 이벤트로 뉴욕한인사회에 잘 알려졌다. 지난 겨울엔 히스패닉 홈리스들을 위해 두 차례나 라면봉사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날의 연극 도전은 그 시도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김성아씨가 리딩훈련과 연기지도, 연출, 나레이션까지 일인사역을 맡았다.

뉴아라봉행사때마다 개근(皆勤)하는 김용정 컬럼비아의대 교수는 목사역을, 송정훈 전 뉴욕한인보험협회 회장은 대사암기가 어려운 장애우 배우들을 위해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었다.


무대에 오른 장애우배우들은 사형수역을 맡은 장상준씨를 비롯, 유명희(소희 역) 씨, 김순영(소희엄마 역) 씨 등 세명이었지만 김태형, 김민제, 박은지. 이광국, 양철승, 피터 씨도 마지막 순간 촛불을 들고 입장해 스프레이를 뿌리며 환호하는 하이라이트 신을 장식, 결국 모두가 함께 하는 뜻깊은 무대를 연출했다.


자신의 대사를 모두 외워 주위를 놀라게 한 김순영씨는 긴장한 탓에 대사를 마치기도 전에 퇴장할뻔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관객들은 무거운 작품에 재미를 더해준 해프닝이었다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가장 먼저 와서 대사 연습을 하는 등 열성을 보인 김용정 교수는 “유치원때 한번 무대에 서보고, 오늘 처음 연기해본건데 이렇게 긴장되기는 처음”이라며 파안대소(破顔大笑) 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주연배우인 장상준씨와 유명희씨였다. 보행과 대사처리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장상준씨와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진지한 표정연기를 선보인 유명희씨는 시한부환자의 모습을 가슴 뭉클하게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뉴아라봉 행사때마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민병옥씨는 “장애인분들의 연기를 보면서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뉴욕=민지영특파원 jymin@b=newsroh.com

<꼬리뉴스>
내년 7월 밀알캠프때 공연계획



이날 행사는 뉴욕밀알선교단 홍보영상과 사진으로 돌이켜보는 뉴아라봉의 지난 시절, 연극 공연의 순으로 진행됐다.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후에는 밀알선교단의 모든 참여자들이 함께 모여 대화도 나누고 노래도 하는 즐거운 뒤풀이도 열렸다.



평소 붙임성있는 모습으로 마스코트 역할을 하는 피터군은 1년동안 재활용 깡통을 모아 마련한 200달러를 뉴욕밀알선교단에 기부하는 깜짝 발표로 훈훈함을 더했다.

밀알선교단의 김자송 단장은 “장애우들이 성극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장애우와 가족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내년 7월 미주 전역의 밀알 장애인들이 참여하는 밀알캠프에서도 공연하면 좋겠다”고 적극 추천(推薦)했다.

지난 1년반동안 밀알의 장애우들과 함께 뉴아라봉을 이끈 김성아씨는 대학로 무대에서 10년간 활약한 정통 연극인이다. 그녀는 “대학로에서 공연할 때 가장 즐겨 먹던 것이 라면이었고 뉴욕에 와서 처음 맡은 역할이 장애인이었다”며 라면과 장애우들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김성아씨는 “앞으로는 1년에 한두편 정도 장애우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해볼 계획”이라면서 “많은 분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로 뉴아라봉이 좋은 결실을 이루게 됐다”며 앞으로도 많은 성원을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