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로 118주기를 맞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묘역에 일본식 석등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는 8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소재한 전봉준 장군의 묘역에 일본석등으로 알려진 ‘카스가 석등’이 세워져 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사실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의 현지 실사를 통해 확인됐다.

혜문스님은 “최근 전봉준 장군의 기일인 5월 9일(음력 3월30일)을 앞두고 전봉준 단소에 방문했다가, ‘카스가 석등’이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일본식 석등을 발견하고 너무나 놀랐다”고 밝혔다.

문제의 석등은 일본 나라의 카스가 신사(春日神社)에 많이 세워져 유행한 석등 양식으로, 옥개석의 맨 끝의 귀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궐수(蕨手·와라비테)’라는 것이 붙어 있다. 이는 고사리 손처럼 말려 올라갔다는 뜻으로 ‘우리식 전통 석등’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양식이다.

전봉준은 1895년 갑오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 지휘자로,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봉기 고부민란을 일으킨 뒤, 보국안민을 기치로 제 1차 2차 농민운동을 지휘했다. 일본군에 의해 좌절당한 후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음력 3월30일 처형되었다.
전봉준 단소는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고부에 ‘전봉준 단소’를 마련 제단(祭壇)과 비석을 세우고 묘역을 조성한 뒤, 매년 제사를 지낸다. 전봉준 장군은 시신을 찾지 못해, 현재 조성된 묘역은 시신이 없는 빈 묘지(虛墓)이다. 비석에는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고 새겨져 있다.
전봉준 장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조선은 일본에 의해 36년간 식민지배를 당하는 불행한 역사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때, 동학농민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전봉준 단소’에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일과 관련, 혜문스님은 일본식 석등의 철거를 요청하는 서한을 정읍시와 천안전씨대종회, 동학혁명기념사업재단 등에 각각 송부했다.

혜문스님은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선 민족사의 영웅을 기리는 묘역에 일본식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며 “청와대 대문마저 일본 신사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석등으로 장식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모든 것이 정신 못차린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소회를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 전봉준 단소에 설치된 일본식 카스가 석등(왼쪽). 전형적인 일본식 석등으로 옥개석(지붕)의 끝이 고사리처럼 말려 올라가 있다. 국보 제 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오른쪽)과 지붕의 끝부분을 비교해 보면, 일본식 석등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꼬리뉴스>
키가 작아 ‘녹두장군’ 별명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3월30일)은 교육자이자 정치인이며 종교 지도자였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북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이곳은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도 있었다.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별명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키는 154cm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 그러나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온건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자 농민군의 북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의금부의 옥에 갇힌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의금부의 공초 중에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의 추궁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만났느냐는 추궁에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고문은 계속 되었으나 자백이 없자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2월 9일, 2월 11일, 2월 19일, 3월 7일, 3월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관에 설치된 헌병의 심문을 받았으나 역시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다가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하였다. 당시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아리(衙吏)가 그를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 이때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어 사형당했고, 그의 후처 여산송씨는 끌려가 노비가 되었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