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총영사관이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한국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과 조선조의 마지막 궁정화가 김은호 화백의 희귀작(稀貴作)들에 대한 실태 조사에 나선다.
손세주 뉴욕총영사는 지난 8일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으로부터 고희동 화백의 수묵산수화와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가 컬럼비아대 도서관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금명간 확인작업에 나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혜문스님은 “고희동 화백과 김은호 화백의 작품들은 미술사적 가치가 상당한 작품들인데 일부 훼손된 상태로 있어 충격을 받았다”면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 작품은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한국인 동문이 수십년전에 대학측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문제는 콜롬비아대학측의 관리소홀이라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않은 우리의 관심 부족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콜롬비아대학으로서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미지의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는 얘기다.
손세주 총영사는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을 조만간 방문하여 작품들을 확인하겠다. 작품 일부가 손상됐다고 하는데 적절한 복원을 대학측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혜문스님은 컬럼비아대학측이 작품이 복원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도서관 갤러리에 전시해놓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밝혔다.


약 70호 크기인 고재동의 수묵산수화는 우상단 일부가 10cm 가량 찢겨졌으며 액자도 파손된 상태이다. 100호가 넘는 대작인 김은호의 미인도는 크게 훼손된 부분은 없지만 역시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다.
혜문스님은 “컬럼비아대학측에 따르면 보수에 필요한 비용은 8천달러 정도라고 한다. 뉴욕엔 차이나타운 등지에 그림과 표구 전문가들이 많아서 얼마든지 작업할 수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날 면담엔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과 문화재제자리찾기 이혁재 간사 등과 뉴욕총영사관의 전성오 문화홍보관이 함께 자리했다.
김정광 원장은 “두 화가의 그림은 각각 수억원을 홋가할 희귀작품들이지만 가격을 떠나서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한채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며 “이번 기회에 보수를 해서 많은 이들에게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이당 김은호 친일경력으로 논란
두 화백의 작품들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에 네티즌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은 우리 미술작품이 미국의 대학 도서관 한구석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것에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상당수 네티즌들은 김은호 화백의 친일경력에 반감을 표시하는 의견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일부에선 김은호 화백이 태평양전쟁이후 친일 행적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삼일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공과를 함께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혜문스님은 “김은호 화백의 친일경력과 미술사적 가치를 갖는 작품이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방치되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는게 바람직한것 같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당을 옹호하는 글과 비판의 글을 소개한다.
이당 김은호는 친일화가인가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궁중화가로서 어진(御眞)을 봉사(奉寫)하여 어진화사가 되었다. 그는 화필을 잡은지 21일만에 어용화사(御容畵師)가된 천재적인 북종화가로서 인물화나 화조 초상화에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세필 인물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한국화단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수난기의 거장이다. 그러나 최근에 친일화가로 지목되면서 인기 하락이 심화되고 있다...
이당은 조선조 마지막 어진화사이며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인물 화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일이 있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에 벽화를 그렸고, 1950년에는 이 충무공 영정을 그려서 순천 충무사와 한산도 제승당에 각각 봉안했다. 그리고 장수와 진주의 논개 영정과 안중근의사 영정, 율곡선생 영정, 신사임당 영정 등 역사상 중요 인물들의 영정을 독점하다 시피 했다. 애국지사 중에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등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후학을 양성시키는 등 6대가라는 명칭에 걸맞게 근대 서화계의 거장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는 1937년 조선 미술가협회 가입하였고 총독부의 의도대로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렸다. 그 당시 총독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이든 자기들의 야욕대로 못하는 것이 없었다. 만약에 지시를 거역한다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끝내는 생활의 위협을 느끼는 시대였다.
그 당시 이당 선생에게 금채봉납도를 주문한 사람은 애국여인회(愛國女人會)에 속한 사람이었고 이당선생이 어진화사로 궁중출입을 도와준 윤비의 백부 윤덕영(尹德榮)가의 부인이였다. 궁중출입에 필요한 의관을 도와준 귀부인들로서 거절할 수 없는 인연을 이용해서 그림을 주문한 것이다. 금채봉납도는 이당선생이 자발적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고 금비녀를 조선군 사령관에게 바치는 사진을 가지고와서 작품화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이당선생이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어진을 모신 화사로 조선화단에 인물화의 일인자라는 사회적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지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독립신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한사람으로서 총독부의 눈밖에 난다면 부모를 모시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이당선생으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난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고충은 고려하지 않고 근대화단의 거장을 가혹하리만치 친일화가로 매도하는 것은 인민재판식 단순논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한 사람으로서 정권차원에서 부탁하는 작품제작을 거절 할 수 있는 용기도 없을 뿐 아니라 서슬이 시퍼런 총독부가 그림을 주문했다면 더욱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독립운동가 중에도 의도적인 친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6.25때 밤이면 좌익하고 낮이면 우익하는 세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좌우익의 사상으로 그렇게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친일도 밀고나 아부를 해서 조선인을 괴롭힌 전력을 가려내서 친일로 판정해야 마땅할 것이다...100년이 가깝도록 노력해서 이룩한 한사람의 예술가를 친일이라는 멍에를 씌워 죽이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당선생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화풍을 선호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한사람의 화가로서 고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내 나름대로의 잣대로 평가해 보는 것이다...진정한 용기는 관용을 베푸는 것이고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사회가 화합하고 번영하는 길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올린다.
청계 /양태석
다음은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한 이태호 전남대 교수가 쓴 글의 일부이다.
김은호(金殷鎬)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은호는 이 땅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순종의 초상화를 두 차례 그린 어용화가이다. 또 봉건 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출발하여 맨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린 친일파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순종의 어진 제작 경력과 빼어난 인물묘사 솜씨로 윤택영, 윤덕영*, 민병석* 등 친일 매판귀족이나 일본인 고관들의 초상화 주문에 응하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인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16회(1937) 때부터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되었다. 선전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관제 공모전이다.
1937년 11월에 그린 '금차봉납도'는 제작 시기로 보아 참여작가의 '영광'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1937년 8월 20일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것이다.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의 처 김복완(金福緩)이 회장으로, 이윤용·민병석 등 매판귀족의 처와 김활란* 등이 간사로 참여한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이다...
왼편에 금비녀(金釵) 따위를 증정하는 회장 김복완과 한복차림의 부인들을, 오른편에 그것을 받는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정밀한 초상화법으로 그린 이 ‘금차봉납도’(1937년작)는 김복완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의 친분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부탁으로 제작된 것이다. 특히 김은호의 초기 화단활동은 윤덕영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는데,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도였다. 윤덕영은 김은호가 어려웠던 청년시절 가장 큰 도움을 준 보호자 겸 은인이었다.
김은호의 '금차봉납도'는 개인적 출세욕에 눈먼 미술인들의 친일화를 부추기고 그 길로 인도하는 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군국주의 경향성의 첫 작품이고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하여 김은호는 윤덕영과의 교분상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당치 않는 변명에 불과하다. 김은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친일활동을 본격화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만주침략(1931)에 이어 대동아전쟁을 선포(1939)하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킨 일제가 경제수탈과 침략전쟁에 광분해 있는 가운데 그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고 군국주의에 야합한 가장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창씨개명에 적극 동조하여 그는 쓰루야마(鶴山殷鎬)라고 성을 바꿀 정도였다.
전시에 후방에서 화가로서 일본'천황'을 위해 '화필보국'(畵筆報國) 및 '회화봉공'(繪畵奉公)하고자 한 조선미술가협회(1941년 결성)에 김은호는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일본화부는 내선일체에 동조하여 동양화부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제11회 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