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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김은호 美컬럼비아대서 희귀작 발견

글쓴이 : 민병옥 날짜 : 2013-02-10 (일) 12:54:53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과 조선조의 마지막 궁정화가 김은호 화백의 희귀작(稀貴作)들이 방치(放置)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과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지난 6일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을 방문, 서양화가 고희동의 산수화 1점과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 1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고희동의 작품은 70호 정도의 수묵산수화이며 김은회의 미인도는 100호가 넘는 크기의 대작으로 컬럼비아대의 한국인 졸업생이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채 일부 손상된 가운데 도서관 특별열람실 구석에 방치돼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갑술년(1934년)에 그린 것으로 기록된 고희동의 산수화는 일부 훼손(毁損)돼 있었으며, 액자도 파손된 상태였다. 이당(以堂) 김은호의 작품 역시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것으로 전해졌다.

 



 

혜문스님은 “컬럼비아대학에 이들 한국 화가 작품의 가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후 시급히 보수절차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에도 보수지원을 요청하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민간단체에서라도 지원해서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희동(1886~9165) 화백은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휘문 보성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대한미술협회장과 대한민국예술원장 등을 지냈다.

 

김은호(1892~1979) 화백은 임금의 어진(御眞 초상화)을 그린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정화가로 정확한 관찰력과 섬세한 묘사법을 통해 미인도 등 인물화에 있어 독보적인 명성을 누렸다.

 

뉴욕=민병옥특파원 bomin@newsroh.com

 



 

<꼬리뉴스>

 

대표적 근대화가 고희동화 백과 김은호 화백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화백은 대한제국 말기에 군수를 지낸 영고철(永喆)의 셋째 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畫譜: 그림을 모아서 만든 책)를 충실히 임모(臨模: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畫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제작이 되었다.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자 그는 신미술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1918년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했다.


 

서화협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書畫協會報)>를 창간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 그 뒤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끌었다.


 

 

▲ 고희동 화백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낸 그는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해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은 인천 출신으로 경성서화미술학교에서 안중식(安仲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사사했고 구한말 어진화가(御眞畫家)로 명성이 높았다.

 

일본에 가서 도쿄미술학교의 청강생으로 연구를 하고 제전(帝展)에서 입선을 하였으며 귀국 후 선전에서 특선, 심사위원도 역임했다. 고려미술원과 조선미술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1936년 후소회(後素會)를 설립해 도제(徒弟) 교육의 전통을 살렸다.

 

 

▲ 김은호의 미인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해방 후에는 5회부터 국전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시문화상, 3∙1문화상, 예술원상, 5∙16 민족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예술원 회원으로 화숙과 수도여사대 등에서 후진을 지도했다.

 

작품은 극채색의 공필인물화(工筆人物畫)에 뛰어나 <춘향초상>, <이충무공영정>, <신사임당과 율곡초상>, <안중근 초상>, <논개 초상> 등이 있고 기명절지(器皿折枝)와 화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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