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중 미군에 의해 도난돼 60년째 미국에 남아있는 문정왕후 어보(御寶) 환수 작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과 미주한국불교문화원(원장 김정광)은 26일 미 국무부와 국토안보부, LA주지사, LA카운티박물관(LACMA) 등 4곳에 문정황후 어보 반환에 협조해달라는 서한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그간 문정황후 어보는 혜문스님을 비롯한 한국과 미국의 불교계에서 꾸준한 환수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번 서한 발송은 법적 송사를 피해 미국 정부차원의 실행을 촉구하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이 일고 있다.
문정황후 어보는 높이 6.45cm, 가로와 세로가 각각 10.1cm로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금장도장이다. 바닥 인면(도장을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어보는 조선시대 각종 궁중 의식에 의례적으로 사용된 왕권의 상징물로 366과가 만들어졌고 현재 국내에 소장된 어보는 322과이다. 이 어보 중 일부가 한국전쟁의 와중에 미군이 약탈됐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문정황후 어보이다.
미군의 약탈기록은 한국전쟁 직후 당시 우리정부의 반환 요청으로 미 국무부가 조사에 나선사실이 혜문 스님과 김정광 미주불교문화원장이 2008년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통해 상세히 남아 있다.

1953년 미 국무성 자문관인 아델리아 홀은 미군이 훔쳐간 어보 등 도난품 리스트를 작성하고 반환에 협조했다. 1953년 11월17일 볼티모어 선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미 대사였던 양유찬 박사가 미군이 훔쳐간 47개의 어보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 어보들의 반환과정에서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2008년 LA카운티 미술관에서 발견됐으며 이 어보의 주인은 문정황후로 밝혀졌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어보의 소재를 파악한 후에도 3년동안 보고서조차 만들지 않는 등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혜문스님 등은 서한에서 “문정황후 어보를 비롯한 47개 어보들이 1950년 한국전쟁중 미군에 의해 도난돼 미국에 불법 반출된 과정을 기록한 아델리아 홀 레코드가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남아 있다”고 상기시켰다. 이와 함께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자료도 아울러 송부했다.

혜문스님 등은 “우리는 도난당한 조선의 어보들을 미국무부가 확인하고 반환의 노력도 기울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는 아델리아 홀 여사의 양심적인 노력과 미 국무부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현재 미국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문정황후 어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떤 이유로도 외국에 옮겨져서는 안되는 보물”이라고 강조하고 “이번 사안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한미우호를 위하여 하루속히 한국 정부에 반환해달라”고 요청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미 국무부와 국토안보부에선 문정황후 어보에 대한 관련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환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환수작업이 지지부진하거나 벽에 부딛칠 경우를 대비해 미주 불교계가 민간차원에서 강력한 환수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도 모색되고 있다.
혜문 스님은 “약탈된 어보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이미 1950년대에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청했고, 이런 과정이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 기록돼 있는만큼 우리 정부가 더욱 강력하게 LA카운티 미술관에 환수요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문정왕후 ‘악녀의 대명사’로 비판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 음력 10월 22일 ~ 1565년 음력 4월 6일)는 조선 중기의 왕후이자 섭정으로 중종(中宗)의 제2계비이다.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이다. 1515년(중종 9년) 장경왕후가 서거하여 1517년(중종 11년)에 왕비로 간택, 책봉되었다.
1543년 대비가 되고, 1545년 아들 경원대군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국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문제에까지 개입하였다. 1550년(명종 5년) 명종이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섭정을 맡았다.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坡山府院君 靖平公 尹之任)과 전성부부인 이씨(全城府夫人 李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들 명종의 즉위 후 약 9년간 수렴청정을 맡았다. 수렴청정기간 중 자신의 친정 오빠인 윤원로, 친정 남동생인 윤원형, 친정 사촌인 윤춘년 등을 기용하였으며, 불교 중흥책을 펼쳐 보우를 중용, 선교양종과 승과를 부활시켰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이자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나중에는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성질이 독하고 질투심이 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그에게 병조판서직을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불교를 장려하고 윤원형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여 사림파 성리학자들로부터 악녀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악녀의 대명사 중 한사람으로 비판받았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이다
<참조=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