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이름 노출은 절대로 도움이 안됩니다.”
최근 라오스에서 북한에 압송된 탈북고아 9명의 안위가 우려되는 가운데 탈북고아 출신 김기훈(19 가명) 군이 언론의 신상공개에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 7일 뉴욕 맨해튼의 소호20 첼시 갤러리에서 만난 김 군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군 역시 부모를 잃고 북한을 탈출, 2년반동안 네차례나 북한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풀려날때마다 생존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밀입국, 2011년 탈북브로커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1년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북송됐다는 뉴스를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중국에서 고생할 때 잘 알고 지낸 아이도 있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김 군은 한국언론이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을 하면서 아이들의 얼굴과 본명은 물론, 동영상과 증언까지 공개되는 것에 더욱 놀랐다고 했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현재 북송 고아들이 평양의 순안초대소에 격리돼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일부에선 이들이 UN을 비롯한 국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당국이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조만간 “남한의 인신매매단에 끌려갔다”며 체제선전의 도구로 동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군은 북한을 모르는 사람들의 순진한 기대라고 말했다. 이번 라오스의 북송이 남한에 대한 외교적 승리라는 점에서 아이들이 한두번 공개될 수도 있겠지만 북한당국이 그들의 안위를 놓고 외국의 눈치를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북한은 눈감고 몽둥이 휘두르듯 세계최강대국 미국에도 큰소리 치는 나라다. 외국의 시선 때문에 아이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취할거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3년 양강도(함경북도와 자강도 사이) 혜산에서 태어난 김군은 교육자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큰 어려움없이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간에 복수가 차, 간병을 위해 중학교 1학년때 학교를 그만뒀다.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지만 북한에서는 제대로 된 경제활동이 가능하지 않았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국경을 넘어 온갖 고생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김기훈 군은 탈북자와 통일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는 서양화가 김공산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는 첼시갤러리의 특별회견에 초청돼 한달전 한국에서 왔다. 미국인 갤러리들을 위해 통역을 맡은 노해진 씨(MIT 박사과정)의 도움으로 자료사진과 함께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국에 넘어간 후에 생활은 어떻게 했나.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중국은 내게 북한보다 더 극한 상황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굶으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러분은 먹기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나는 오직 먹을것만 찾아다녔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사람도 먹는 것처럼 보였다. 장백현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먹을 것을 안줬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거다. 그때부터 빌어먹으며 살았다.”
-그때가 몇 살인가
“열네살이었다. 북한보다 잘사는 중국이었기 때문에 구걸하면 얼마든지 먹을건 있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당을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했고 중국말도 열심히 배웠다.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밀수하는 사람들의 짐꾼 노릇을 하며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북한에 여러번 끌려갔다고 하던데.
“2년반동안 중국 공안에 수도 없이 잡혔고 네 번이나 북한의 보위부에 끌려갔다. 잡혀가서 구타당하고 정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문도 당하고...평생 맞을 매를 그때 다 맞은것 같다. 하지만 나같은 꽃제비는 먹을게 없어서 중국에 간걸 알고 나이도 어렸기때문에 오래지 않아 풀려날 수는 있었다. 그때마다 중국으로 넘어갔지만 번번이 잡혀가면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탈북자들이 잡혀가면 강제노동수용소에 가지 않나?
“중국에서 잡히면 보통 일반교화소로 가지만 중국이외의 지역에서 잡히면 무조건 강제노동수용소행이다. 한국으로 탈출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북송된 탈북고아들은 라오스에서 잡혔지만 어른들의 꾐에 빠져서 모르고 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과 이름이 한국언론에 다 나오고 아이들이 한 말이 동영상으로 다 공개된게 너무나 안타깝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한국에 갈 수 있었나
“한국에 가려면 탈북브로커와 선이 닿아야 한다. 먼 대륙을 돌아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돈도 수천달러가 든다. 그때 밀수를 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휴대폰도 있었고 SNS를 통해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중국 남쪽 어디로 오라고 해서 가는데 공안과 여러번 마주쳤지만 중국말을 좀 했기 때문에 무사히 도착해 결국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미국인 남성의 질문) 북한에서 동성애자나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나
“북한에서 동성애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아마 커밍아웃을 누가 한다면 하기도 전에 죽게 될거다. 마약을 하는 사람은 많다. 나도 해봤다. 생존을 위해서도 마약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후 생활은
“한누리공동체를 운영하는 최 다니엘 선교사님을 통해 신앙을 얻고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지금은 독립해 룸메이트와 생활한다. 한 회사의 인턴사원으로 일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희망은
“대학에 가면 정치외교학이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 무엇이 되건 통일을 위해 일하고 싶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UN의 반기문 사무총장이다. 만약 한번 만나뵐 수 있다면 지금도 중국에서 떠도는 5천여명의 탈북고아들 이야기를 꼭 해드리고 싶다.”
-북한의 새 지도자 김정은을 어떻게 생각하나
“(집권 후) 한두달은 희망을 가졌다. 개혁과 개방으로 가려고 했다. 북한에 핸드폰이 확산된 것도 그 영향이다. 그후 (한국과 미국에) 적대적으로 바뀌었지만 (대화를 위해) 돌아서길 기대한다.”
-(한 여성의 질문) 북송된 탈북고아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기도해달라. 중국에 있는 탈북자 한사람을 데려오려면 몇천달러가 든다. 그들을 돕는 단체들에 기부해달라. 중국에 있는 탈북고아들을 제발 도와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