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미국의 위안부기림비 저지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어 한인사회의 우려(憂慮)를 사고 있다.
일본 LA총영사관의 준 니이미 총영사는 캘리포니아 부에나파크 시의회의 위안부기림비 설립안 표결을 하루 앞둔 22일 엘리자베스 스위프트 시장과 시의원 4명에게 “위안부 문제 등 과거역사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이미 끝난 문제”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서한은 24일 가주한미포럼(회장 윤석원)이 주최한 ‘글렌데일 일본군성노예 기림비 제막식 관련 브리핑 및 부에나파크 기림비 경과보고’에서 밀러 오 부에나파크 부시장이 공개해 알려졌다.
부에나파크 시의회는 23일 기림비건립안 표결을 9월초로 전격 연기한 바 있다. 바로 전날 도착한 일본총영사의 편지가 표결 연기에 상당한 영향을 준 셈이다. 한인사회 일각에서는 당초 부에나파크 시의회에 너무 빨리 의제로 채택됐다는 점에서 연기 결정이 차라리 잘 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일본정부와 일본커뮤니티의 최근 동향(動向)을 보면 우려스런 대목이 적지 않다.
준 니이미 총영사는 지난 21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일본은 어떻게 배상했나(How Japan has made Amends)’라는 기고문을 보내 “일본은 과거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완전하게 이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니이미 총영사는 부에나파크 시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취지(趣旨)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과거 일본 총리 명의로 작성된 ‘위안부 피해자에게 보내는 편지’ 번역본도 따로 첨부하는 등 사실을 호도하기 위한 자료를 첨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부에나파크 시의회 분위기는 기림비건립안 통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됐으나 일본총영사의 편지 자료들이 도착한 이후 반대(1명) 및 중립(2명)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지적이다. 중립 의원들은 “위안부기림비 안건을 결정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는 후문이다.
일단 표결을 무산(霧散)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주민들을 앞세워 9월 표결에서 부결을 이끌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미 지난 4월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한인사회가 사우스필드 시립도서관 앞에 추진하던 위안부 소녀상 건립계획을 총영사관과 기업인들이 나서 적극적인 로비로 좌초시킨 바 있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24일 “미국의 일본계 주민들이 강력반발하고 있다”면서 “위안부 소녀상 건립에 반대하는 단체를 만들어 철거 활동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보도해 위안부 기림비에 대한 철거 운동도 본격화될 것임을 시사했다. 위안부역사를 ‘논란거리’로 만드는 일본의 전략은 일부 미국의 주민들로 하여금 “왜 죽은 전쟁 매춘부들을 추모하는 비석을 공공장소에 세우느냐”며 거부감을 확산(擴散)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기림비 건립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미국의 정치인들도 일본계 주민들의 압력에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한국총영사관과 한인주민들의 강력한 맞불작전이지만 현재까지는 실망스러운 상황이다.
일본총영사가 좌충우돌하며 맹활약(?)하는 반면, 한국총영사관의 경우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과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한일간 분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인사회에서는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움직이는데 우리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해야 하는게 아니냐. 가만히 있으면 일본의 거짓 논리만 먹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한인커뮤니 정치인에 적극로비 필요
한인 주민들의 적극적인 대응도 중요하다. 최근 글렌데일 시의회에서 위안부 소녀상 건립(建立)을 놓고 마지막 공청회가 열렸을 때 참석한 한인주민들은 일본계 주민들의 3분의 1이었고 시의회가 받은 항의편지도 200통이 넘었지만 찬성하는 편지는 단 3통에 그쳤다.
이번 부에나파크 건립안 역시 안건 논의가 알려진 지 이틀 만에 60여통의 항의메일을 받은 반면 옹호하거나 격려하는 한인주민들의 편지는 단 한통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풀뿌리 캠페인을 통해 미주최초의 위안부기림비를 건립한 시민참여센터는 “투표권을 가진 주민들이 현지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위안부기림비가 한일간의 이슈가 아니라 보편적인 전쟁 인권의 이슈이기 때문에 건립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