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수호신’ 안용복이 뉴욕 맨해튼에서 독도를 지키는 퍼포먼스로 등장한다.
10월 6일 펼쳐지는 제32회 코리안퍼레이드 & 페스티발에 경상북도가 ‘독도바로알리기’ 활동에 나선 가운데 독도수호의 역사적 인물로 잘 알려진 안용복을 재현하는 행사가 기획돼 관심을 모은다.
코리안퍼레이드의 주최측인 뉴욕한인회는 뉴욕의 한인과 미국인들에게 독도의 역사적인 진실을 알리기 위해 경상북도와 함께 대형 독도사진을 배경으로 안용복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등 홍보부스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인 것을 일본막부가 스스로 인정하는데 큰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다. 일본과 독도문제로 외교적인 마찰을 빚고 있는 지금, 역사적 인물인 안용복을 내세워 일본의 독도침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세계인들에게 알리겠다는 것이다.
부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경상북도가 제작한 ‘독도이야기’. 영문과 한글로 교차 상영하는 홍보 영상으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에 대한 사계절의 모습과 함께 독도를 지키는 독도의 괭이 갈매기 등 동․식물,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와 독도 수호 행사 등 다양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홍보부스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배포할 기념품도 관심을 끈다. 경상북도는 부스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독도의 모습이 담긴 엽서와 리플렛 등을 제공하고, 독도가 왜 대한민국의 영토인가 하는 역사적인 사실도 설명해 준다.
경상북도 뉴욕 김준호 주재관은 “뉴욕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미국인들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편 ‘제32회 코리안 퍼레이드 & 페스티벌’은 뉴욕한인회가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고, 한인들이 함께 모여 어울리는 축제로 화려한 한국전통 풍물공연, 퍼레이드, k-pop 공연, 노래자랑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뉴욕=노정훈특파원 jungroh8909@hanmail.net
<꼬리뉴스>
안용복, 조선숙종때 어부출신 민간외교가
안용복(安龍福)은 조선 숙종 때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인 것을 일본막부가 스스로 인정케 한 어부 출신 민간외교가다.
1654년 동래부에서 태어난 안용복은 홀어머니 아래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엄한 가훈을 받고 자랐다. 일찍이 동래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
1693년(숙종 19) 동래어민 40여명과 을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하여 침입한 일본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때 호키주(百耆州)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쌀의 두량(斗量)과 베의 척(尺)을 속이는 등 중간에 농락이 심한 것 등을 밝히고,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가지고 오는 도중에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겼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계획으로 다케시마(竹島)문서를 위조하여 같은해 9월 차왜(差倭)를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서계를 보내어 조선의 어민이 일본영토인 다케시마에서 고기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과 우의정 민암(閔黯)이 무사주의의 외교정책을 취하여, 비워둔 땅으로 인하여 왜인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책이라 하고 멀리 떨어진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조선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권하는 예조복서(禮曹覆書)를 작성하여 동래의 일본사신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에서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694년 8월에 대마도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예조복서를 반환하면서 울릉도라는 말을 빼고 다시 작성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강경한 태도로 삼척첨사로 하여금 울릉도를 조사하게 하고 접위관을 동래에 보내어 오히려 일본이 남의 영토에 드나든 무례함을 책하는 예조서계를 차왜에게 전달하였다.
1696년 봄에 안용복은 다시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어로중인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송도(松島)까지 추격하여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침범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범경(犯境)의 사실을 항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남구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을 보냈다.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철종시대까지는 울릉도에 대한 분쟁은 없었다. 한 어부로서 나라의 일에 크게 공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