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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한인사회 구익균애국지사 현충원 안장불가 반발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3-04-21 (일) 10:21:50


 

“구익균선생의 애국일생을 모욕(侮辱)하지 말라!”

 

최근 타계한  항산(恒山) 구익균(具益均) 애국지사의 현충원 안장 불가 결정에 대해 뉴욕한인사회가 반발하고 있다.

 

대뉴욕지구 광복회와 미주흥사단 뉴욕지부 등은 대한민국 정부가 구익균 애국지사의 현충원 안장을 거부한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하고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최고령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항산(恒山) 구익균(具益均) 선생은 지난 8일 향년 105세를 일기로 별세(別世)했다.

 

190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항산 구익균 선생은 도산 안창호의 비서실장으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이자 해방후엔 반독재투쟁을 벌인 주인공이다. 1928년 신의주 고보시절 항일 잡지 ‘신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3월 신의주 학생 의거를 주도했다. 왜경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亡命)한 선생은 1933년 광둥의 중산대에 근무하면서 한국 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특히 사업가로도 비상한 능력을 발휘해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댄 선생은 1945년 8월 상해 교민단장으로 있을 때 돈이 없어 조국에 돌아갈 길이 막막한 망명교민 3000명을 위해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인 70만 달러를 희사한 것은 유명한 일화(逸話)이다.

 

선생은 생전에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조국에 돌아가고 싶어 애태우던 상해의 교민들을 도왔을 때”라고 회고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국립묘지에서도 윗줄에 안장해야 할 애국지사를 국가보훈처가 거부한 것은 어이없게도 70년대초 조세법 위반과 사문서 위조로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막내딸 구혜란씨 등 유족들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아버지를 유족들의 소명도 받아보지 않고 묘지 안장을 거부한 것은 말도 안된다. 현충원을 가고 못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해온 아버지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분노하고 있다.

 

이에 뉴욕한인사회가 나서게 된 것은 구익균 선생이 뉴욕에 끼친 지대한 공적덕분이다. 한반도영세중립화운동본부의 김경락 상임대표는 “구익균 선생은 1982년 뉴욕에 와서 도산의 후예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었다”면서 “2005년 귀국후엔 ‘도산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을 창립하고, 2009년엔 ‘대독립당’을 재창당하는 등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을. 해방후에는 통일운동에 헌신하는 등 평생을 애국하셨다”고 소개했다.

 

지난 10일 고인의 친손녀인 구영란씨의 플러싱 자택에서 추도식이 열려 고인의 업적을 돌아보는 기회가 마련됐다. 뉴욕엔 차남 구해웅씨와 외손자 최 제임스(흥진) 씨 가족이 살고 있다.

 


 

이날 참석한 장철우 목사와 김경락 목사, 윤창희 변호사 등 흥사단 뉴욕 관계자들과 이용찬 뉴욕 광복회 회장 등은 본국 정부의 안장불가 결정은 시대적 배경을 외면했을뿐 아니라 사실 관계도 바르지 않은 것을 구차한 이유로 삼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외손자 최흥진 씨는 “1972년과 73년 사문서위조 등의 집행유예를 받을 때 당시 회사 대표로 할아버님이 이름만 올려졌다는 것을 당국이 인지하고도 법으로 옭아맨 것”이라면서 “할아버님은 당시 독재정권에 반대하고 혁신계통 인사들을 지원하는 등 밉보인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설사 법적으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평생 나라와 조국을 위해 몸바친 공적(功績)이 깡그리 무시되서는 안된다. 더욱이 현충원엔 일제 앞잡이를 했거나 뇌물수수죄로 2년6개월의 실형을 산 쿠데타의 주역도 묻혀 있다. 그런데 진짜 애국자는 안장이 거부된다는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뉴욕서 한반도영세중립화추진본부 설립 등 통일운동

 

구익균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해 도산 안창호의 통역 겸 비서실장을 하셨고 백범 김구와 함께 상해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동할 당시 장개석 중국 총통을 움직여 거처와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또한 중국 광동의 명문대인 중산대학 조교수로 들어가 독립운동에 힘쓸 엘리트 학생들을 왜경 몰래 데려와 중산대학에 입학시키는 등 교육에도 힘썼다.

 

해방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전두환 정부에서 장관과 입법의원(국회의원)의 자리를 주겠다는 회유와 협박에도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또 뉴욕과 LA에서 흥사단 원로로 활동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과 북이 중립적인 자세로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한반도영세중립화추진본부 위원회라는 NGO 단체를 유엔에 등록시키기도 했다.

 

최흥진씨는 “할아버지는 필요한 모든 전화번호를 다 외울만큼 머리가 비상하셨다. 71세때 같이 살 기회가 있었는데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대수 방정식을 가르쳐주실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미국 생활 당시 90이 넘은 연세에도 뉴욕과 LA, 홍콩, 대만을 오가며 홀로 오파상(무역업)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엠파이어 머천츠 LLC의 와인컨설턴트인 최흥진 씨는 “한번은 할아버지를 따라 홍콩에 간 적이 있는데 고령에도 큰 이민가방 서너개를 혼자서 다루시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돈을 1만달러 이상 벌어서 흥사단에 기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현재 흥사단과 광복회 회원이자 뉴욕경찰자문위의 범죄담당 부회장을 맡고 있는 최씨는 “평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과 재산을 다 바쳐 살아오신 분이기에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김경락 목사 등은 “구국충정의 일념하에 가족을 희생시키고 이국땅에서 청춘을 던져 조국광복에 헌신하던 애국지사의 안장을 거부하면 도대체 현충원엔 누가 가야 하냐?”면서 “본국 정부는 하루속히 잘못된 결정을 철회하고 애국지사에 마땅한 예우(禮遇)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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