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억울한 살인누명, 범아시아계 구명운동으로 10년만에 석방
미국 내 아시아계 민권운동의 효시(嚆矢)로 평가되는 이철수(61) 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타계했다.
미주한국일보와 미주중앙일보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철수씨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지난 2일 지병(持病)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씨는 92년 화재사건으로 화상을 입어 수십 차례 피부이식 등 수술을 받는 등 후유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철수씨는 지난 1973년 6월3일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단원이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에서 한 관광객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종신형(終身刑) 선고를 받고 수감됐다. 당시 이씨는 현장 근처에서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으나 물증도 없이 범인으로 몰렸고 ‘용의자가
아니다’라는 또다른 목격자의 증언도 무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의 억울한 사연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77년 복역중 칼을
휘두르며 시비를 걸어온 백인 갱단출신 수감자와 싸우다 살해해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부터다. 이씨의 일본계 친구 야마다 란코 씨는 교도소내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이씨의 살인이 정당방위 차원에서 싸운 정황(情況)이 무시됐고 애초의 복역 또한 억울한 누명때문이라는 사실을 백방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UC데이비스 대학원에서 법학공부를 하던 유재건 전 국회의원은 이씨를 면담한 뒤 고교 교사이던 그레이스 김 전
한미연합회 회장 등과 함께 ‘이철수구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재판 서류 등을 샅샅이 뒤져 이씨가 잘못된 재판 절차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이경원 기자도 이씨 사건에 의문을 갖고 탐사취재에 들어가 78년 1월29일 특집기사
‘차이나타운의 앨리스’를 통해 이철수씨의 억울한 사연을 널리 알렸다. 이를 계기로 한인사회를 비롯한 범 아시아계는 ‘이철수에게 정의를
찾아주자’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후 5년여의 기나긴 노력 끝에 1982년 9월2일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무죄평결이 내려졌고 이듬해 3월28일 샌호아킨 법원이 석방을 판결, 이씨는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지인들에 따르면 이씨는
웰페어와 의료보험에 의지하는 등 힘겨운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의 영결식(永訣式)은 오는 9일 오전 11시 북가주 샌부르노
여래사에서 엄수된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영화화 될뻔한 이철수사건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jhoebi&folder=13&list_id=5670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