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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서재필박사 ‘사랑이야기’ 우표 발행

글쓴이 : 노정훈 날짜 : 2014-12-30 (화) 09:58:32

 

미국서 서재필박사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우표 3종이 발행돼 화제가 되고 있다.

 

서재필박사탄신 150 주년 기념으로 필라델피아의 서재필기념재단이 발행한 이 우표는 3종류 15시트로 한국 독립영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우표3.jpg


 

기념우표는 지난 10일 제작됐지만 사진이미지 보정(補正) 작업이 추가돼 29일부터 정식으로 판매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재필의 사랑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우표들은 서재필박사의 부인 뮤리엘 조안나 암스트롱 여사의 결혼직전 모습과 1894년 결혼후 서재필 박사 부부의 자전거 하이킹 모습, 1938년 자택에서 애견을 데리고 담소하는 서재필 박사 부부 모습 등 희귀 사진자료들을 담고 있다.

 

1894년의 자전거 하이킹의 경우, 서재필 박사가 사진 뒷면에 ‘아내와 함께 어느날 자전거를 타다 사진을 찍었는데 마치 연인들이 다투는 모습처럼 나타났다’고 적은 일화도 있다.

 

 

 


 

우표2.jpg


 

 

기념우표들은 ‘서재필박사 탄신 150주년 기념’이라는 제목과 각각의 소제목이 하단에 기재됐다. 기념우표 시트 판매가는 30달러이며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우송 판매하고 있다.

 

한편 우표를 제작한 골든애플즈 사는 ‘서재필의 사랑이야기’를 2015년 상반기에 웹툰으로 제작하여 선보일 예정이다.

 

미국에서 서재필 박사 관련 기념우표는 지난해 11월 독립신문 등 우표 2종과 올해 2월과 4월 등 지금까지 3차례 발행된 바 있다.

 

뉴욕=노정훈기자 newsroh@gmail.com

 

 

 

 

 


 

Dr. Philip Jaishon-APPROVAL.jpg


 

<꼬리뉴스>

 

서재필, 한국인 최초의 미국시민권자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Philip Jason)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해부학자, 의사로 활동했다.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처음 그는 막노동과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농장 업무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여러 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 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사립고를 마치고 워싱턴 컬럼비안 대학(지금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다.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6년 9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 입상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225px-Young_Philip_Jaisohn.jpg


 

 

1888년에는 야간반으로 전과했는데 이때 그는 낮에는 워싱턴 D.C에 가서 미국 육군 군의학 도서관에서 사무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부담했다. 1888년 가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의 콜롬비아 대학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노동의 여가로 틈타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했다.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M.D.)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에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4년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를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고충을 들어주었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간단하게 친지들을 불러 같은해 6월20일 워싱턴 DC 카버넌트 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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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 사이에서 두 딸 스테파니 제이슨가 뮤리엘 제이슨이 태어났다. 일찍 결혼한 장녀 스테파니는 남편을 잃고 포목상 상점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둘째 딸 뮤리엘은 화가였다.

 

<꼬리뉴스 출처=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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