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칠흑(漆黑)처럼 암담(暗澹)한 세상에서 빛이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구출(救出)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영웅(英雄)입니다...”
백발의 노인이 안경 쓴 또다른 백발의 노인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며 듣던 안경 쓴 노인의 눈가엔 조금씩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뉴저지 잉글우드클립스의 한 행사장. 미연방하원에서 최초로 통과한 ‘위안부결의안’의 주역 마이크 혼다 의원의 8선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혼다의원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가 지역구이고 의정활동은 연방 수도 워싱턴DC에서 하지만 뉴욕뉴저지 한인사회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시민참여센터(구 뉴욕한인유권자센터) 주도로 시작된 한인풀뿌리 운동의 결실로 지난 2007년 연방하원에서 위안부결의안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통과됐을 때 긴밀한 공조를 한 주역이 바로 혼다의원이었다.
일본 정부의 치열한 반대로비를 무력화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일본계3세인 혼다의원이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인도계후보인 로 칸나 후보를 물리치고 8선에 성공한 혼다의원을 축하하는 행사를 시민참여센터가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이날 공식행사에 앞서 김동석 상임이사는 특별한 자리를 주선했다. 마이크 혼다(74) 의원과 백영현(72) ‘일전퇴모(일본전범기퇴출시민모임) 공동대표의 만남이었다.
엇비슷한 나이와성성한 백발의 혼다 의원과 백영현 대표는 공통점이 많다. 혼다 의원이 30년 교직생활을 하고 정의와 인권을 위해 정치에 투신했다면 백영현 대표는 30년 엔지니어의 길을 걷다가 환경과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공통점은 전쟁범죄의 역사를 가리려는 오늘의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전사’들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연방 정치가로서, 또 한사람은 시민운동가로서 지난 10년간 각자의 위치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해왔다.
그런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13년 6월이었다. 당시 혼다 의원은 뉴저지 팰리세이즈팍의 1호 위안부기림비를 빌 파스크렐 의원과 함께 처음 참배했다. 페어론에서 작은 화원을 운영하는 백영현 대표는 2010년 기림비 건립이후 무료 조경을 책임지고 지속적인 관리를 해 왔다.
혼다 의원이 기림비 앞에 헌화(獻花)한 꽃도 백 대표가 마련한 것이었다. 그날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속에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혼다 의원의 모습을 백영현 대표는 뇌리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1년반만의 재회를 앞두고 백영현 대표는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위안부피해자 구술집 ‘들리나요?’의 영문판과 위안부기림비 앞에서 촬영한 사진 5장, 그리고 나눔의 집에 기거하는 이용수할머니의 감사편지였다.
지난달 완역 출간된 위안부피해자구술집은 위안부피해 할머니 열두명과 한 명의 시민운동가의 생생한 증언이 실린 것으로 미주한인기획사 미디어조아(대표 한지수)의 주도로 1년여 작업 끝에 지난달 영문판이 출간됐다.
이 책을 건네받은 혼다 의원은 “위안부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은 너무나 귀중한 역사의 자료다. 이제까지 해 온 일 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다”면서 “연방의회에 전달하고 이 책들을 널리 알리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영현 대표에게 만남을 기념해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해 시선을 끌었다. 백 대표는 서명과 함께 이용수 할머니가 혼다 의원을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르며 전달을 부탁한 감사 편지 몇구절을 써내려갔다.
백영현 대표는 “역사를 외면하는 오늘의 일본을 준엄하게 꾸짖는 혼다 의원이야말로 일본의 양심이 아닐 수 없다”며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하는 혼다의원에 대한 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 오늘 편지를 가져와 몇 구절을 함께 썼다”고 말했다.
혼다 의원은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는 어떤 행위도 성공할 수 없다”며 “한인커뮤니티의 활동이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큰 힘을 주는만큼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반드시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자”고 독려했다.
뉴욕=민지영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 2013년 첫 발간<2013년 6월 6일>
정부가 발간한 첫 일본군 위안부 구술기록집이 영어로 번역돼 미국 전역에 배포된다.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박인환)는 올해 2월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를 영역해 출판키로 했다고 6일 밝혔다.
최근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르면서 미국 내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박 위원장은 “일본 우익 진영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증거가 있으면 대라'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證據)는 살아계신 분들의 증언”이라며 “팩트로 대응해 나갈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2명과 이들을 위해 활동한 인권운동가의 육성이 실려 있다. 번역은 미국 뉴저지에 있는 한인 미디어업체 '미디어 조아'가 맡고 한국인 교수와 유학생, 미국인 등 6명이 참여한다. 올 11월까지 번역을 마무리하면 곧바로 위원회가 미국 전역에 1만여 권을 배포할 예정이다.
박 위원장은 “학술논문보다는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육성이 외국인들에게 더 의미 있게 와 닿을 것”이라며 “정부 부처가 직접 나서면 외교적 문제로 비화(飛火)할 수 있어 기능이 독립된 우리 위원회가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이 작업을 위해 정부와 논의하지 않고 위원회 차원에서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위원회 측은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생긴 이후 이듬해부터 2년에 걸쳐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생생한 사례들을 들었다. 발간이 미뤄지던 것을 올해 2월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구술집으로 엮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