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실각은 미국 CIA의 작전이었다."
제55주년 4.19혁명을 맞아 로스앤젤레스의 한 강연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下野) 후 하와이 망명은 미국 정부의 치밀한 작전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19일 서울대남가주동창회 ACRO가 주최한 4.19혁명 제55주년 기념특별강연에서 김태환 남가주한인하버드동창회장은 "이승만 박사에 관한 두가지 미해결의 신화가 있다. 자진사퇴(自進辭退)와 자진망명(自進亡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미국의 시나리오였다"고 주장했다.
김태환 회장은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4.19혁명과 이승만의 실각'이라는 주제강연에서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학생들이지만 미국은 권토중래를 꿈꾸던 그를 제거(除去)하기 위해 사실상 하와이에 유배(流配)시켰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미대사관 직원이었던 윌리엄 와츠의 증언과 미 외교연구협회(ADST) 자료들에 따른 것이다. 김태환 회장은 "미국은 1959년부터 이승만의 하야를 추진했다. 이승만은 학생들의 시위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사임을 거부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그의 재기를 막기위해 미국이 하와이에 보내는 유배작전을 실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이 독재를 강화하자 4·19 전 해인 1959년 여름 월터 저드 하원의원을 비밀특사로 보내 "후계자를 선정하고 은퇴할 것"을 종용했으나 거부됐다. 미대사관 서기관이었던 윌리엄 와츠는 훗날 "이승만이 편지를 보고 침을 뱉어 던져버렸다"는 비화를 전했다.
4월19일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미국은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항의각서를 전달했고 21일엔 크리스티안 허터 국무장관이 모종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국무위원들의 일괄사퇴와 부통령의 사퇴에도 이승만은 23일 부상 학생을 위로방문하는 등 전혀 하야를 고려하지 않았다.
24일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내놓자 이튿날 대학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하야를 촉구했다. 결국 이승만은 26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이화장에서 칩거(蟄居)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사람들에 둘러싸였고 재기를 꿈꿨다. 김태환 회장은 "미국은 이승만이 '국민들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건 것부터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화장에 모 장성이 출입하는 등 심상치 않은 기류가 조성되자 더 이상 국내에 둬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시 허정 수반을 회유(懷柔)해 휴양차 하와이로 잠시 나간다는 구실을 대게 했다. 대국민용 홍보자료로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을 마련해 전세비행기 비용을 댔다고 발표했지만 실은 미국이 CIA 비행기를 태워 납치하듯 유배시켰다는 것이다.
김태환 회장은 "이같은 작전은 주한 부대사 마샬 그린이 기획하고 월터 맥코너기 대사가 실행에 옮긴 것으로 이후 마샬 그린 부대사는 미 국무성에서 '쿠데타 마스터(CoupMaster)'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4월 혁명의 가까운 원인은 자유당 강경파의 작품인 3.15부정선거이후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되고 19일 경무대앞에서 대학생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지만 이미 1958년부터 미국은 고령과 건강악화속에서 독재를 강화하는 이승만에게 지속적인 경고메시지를 전달하고 퇴진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기실 아이젠하워와 이승만은 오랜 악연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듬해 한국을 방문하고 소모적인 전쟁으로 더 이상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며 휴전협상에 피치를 올리게 됐다.
6월8일 휴전 협상의 최대 쟁점인 포로 송환문제 타결로 휴전(休戰) 조인(調印)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6월18일 이승만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 협상은 결렬 위기에 처했다.
김태환 회장은 "반공 포로 석방은 이박사의 영웅적 쾌거로 불렸지만 이미 포로 교환 합의로 불필요한 행위였다. 중공군의 6월 공세에 패해 단독 북진론이 무색하게 되자 국면전환을 위한 언론 플레이로 반공포로들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7월13일 중공군은 금성천 지역에 참전 후 최대 규모의 공세를 펼쳤고 아군은 전후 최대의 피해(국군 3만명, 미군 5천명 사상)를 입고 휴전에 동의하게 됐다. 김 회장은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때문에 휴전조약이 5주이상 지연되면서 죽지않아도 될 우리 자녀들이 희생됐다고 땅을 쳤다. 이후에도 그는 이 박사가 북진 통일에 미국을 끌고 들어갈까봐 항상 경계했다"고 덧붙였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이승만때문에 3만명 희생?” LA 김태환씨 ‘한국전쟁’ 충격증언 <2014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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