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 꼼수'가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한 해외 홍보 웹사이트에서도 교묘하게 작동(作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일본군 강제위안부 피해자를 주어(主語)를 생략한채 '인신매매 희생자'라고 본질을 흐리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에 있는 일본대사관 웹사이트도 이러한 술수가 드러나 불쾌감과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27일 현재 주한일본대사관과 주미일본대사관 등 일본의 재외공관 사이트에 링크된 독도와 동해 등의 홍보배너들을 보면 교묘한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대사관 웹사이트의 다케시마 배너를 클릭하면 일본 외무성 사이트로 연결된다. 독도 사진을 배경으로 '竹島(죽도) Takeshima' 제목과 함께 영어 아랍어 중국어 등 12개국어 서비스 선택메뉴가 나온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른쪽 아래 위치한 지도이다. 독도 울릉도와 경상북도 일부, 일본 시마네 현 일부를 표시한 이 지도는 화살표와 함께 거리가 표시돼 있다. 문제는 독도를 기점(起點)으로 일본이 한국보다 가까운 것으로 호도(糊塗)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도와 한반도 최단 거리지역인 울진 죽변항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독도의 거리를 217km로 표시한 반면, 독도와 시마네 현의 거리는 211km로 표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도와 죽변항은 216.8km, 독도와 시마네현 마츠에 시는 220km로 한반도가 더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영유권 논쟁에서 본토와의 거리는 중요하지 않지만 억지주장을 되풀이하는 일본으로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듯한 인상이다.
가장 가까운 섬을 기준할 경우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87.4km인 반면 독도와 시마네현 앞 오키 섬은 157.5km로 두배 가까이 멀다.
일본은 이것마저도 눈속임을 유도하고 있다. 오키 섬과 독도의 거리 158km는 표기됐지만 독도와 울릉도의 거리표기(88km)는 화살표에서 벗어나 다케시마 이름 위로 잘 안보이도록 써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도를 보는 사람들은 독도가 한국보다 일본이 더 가까운 것으로 착각(錯覺)할 수도 있다. 주변 바다의 공식명칭도 '일본해'인만큼 외국인들은 다케시마 영유권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영토(Japanese Territory)' 배너는 더욱 어처구니 없다. 역시 외무성 사이트로 연결되는 이것을 클릭하면 상단에 12개국어 서비스를 안내하며 큰 지도가 등장한다. 일본 열도와 한반도 만주 대만 필리핀 일부가 나온 이 지도엔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북방 4개섬과 센카쿠열도, 그리고 다케시마를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토분쟁 지역을 두드러지게 표시한 부분이다. 북방 4개섬과 센카쿠열도는 태평양 지역에 표기했지만 독도는 엉뚱하게도 원산 일대와 만주 간도에 걸쳐 동그란 원으로 '다케시마'라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다케시마 명칭을 주변 바다에 표기할 수 있음에도 'Sea of Japan‘을 크게 쓰고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표기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다.
재미언론인이자 웹서치전문가 문기성 씨는 "일본이 다케시마 표기를 다른 곳에 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한반도 상단과 만주 일부에 걸친 것은 대륙 진출을 꿈꾸는 군국주의의 야심을 은연중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군국주의의 피해자인 한민족과 중국의 입장에선 불쾌하기 짝이 없고 특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날조(捏造)하는 주장을 한반도 위에 쓴 것은 모욕적인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독도 표기를 일본 열도(列島) 위에 크게 써놓는다면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고 지적했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독도(獨島)라는 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코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과 독도의 관계는.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독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귀중한 요충지임을 인식한다. 일본 해군이 설치했던 20개소의 해군 망루 중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설치하였다. 일본이 독도에 야심을 드러낸 것은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나카이(中井養三郞)의 독도 어업 독점권은 어떤 목적에서 나왔는가.
나카이는 독도에서의 물개잡이가 이익이 많았으므로 독점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독도를 확보할 목적에서 이 사업이 추진되었다.
1904년 9월29일에 해군성의 협조로 일본 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의 세 대신에게 ‘리앙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다.
내무성은 한국정부와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이 청원을 각하하려 하였으나 외무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를 허가해 주었다.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되었는가.
제1차초안(1947.3.20.)과 제2차초안(1947.8.5.), 제3차초안(1948.1.2.), 제4차초안(1949.10.13), 제5차초안(1949.11.2.)까지는 독도가 명기되었다가 제6차초안(1949.12.29.)에는 일본 측의 집요한 로비로 인하여 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이 초안을 본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한 항의가 있었는데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의 항의가 있었다. 이 중 영국은 세 차례의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을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독도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1) 우리의 주권을 분명히 행사할 수 있다(영해, EEZ, 어업권).
2) 무한한 지하자원의 보고다(냉동 가스는 전국이 30년 쓸 분량이 매장됨).
3) 미래의 식수원이다(심층수의 활용).
안용복의 제2차 독도수호 운동
안용복은 숙종22년(1696)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노헌(雷憲)과 이인성(李仁成)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들은 체포함이 마땅하다”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우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나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거짓말하였다.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하고 이들을 꾸짖어 내쫓았다. 안용복이 이튿날 배를 타고 우산도(독도)에 들어가 보니 일본인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며 큰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이 모두 도망갔다.
안용복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러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의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 가기도 했는데 일본이 격식도 없이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용복은 이에 격분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로 향하였다. 안용복은 이때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므로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침입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이 때 마침 대마도의 도주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니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안용복에게 쫓겨 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고 안용복 등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숙종22년(1696)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다고 재확인하므로 논쟁은 종결되었다.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고시
1905년 2월15일의 훈령으로 시마네현의 지사에게 통고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22일자에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이 고시 내용은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에 1905년 2월24일자에 조그맣게 보도되었다.
중앙정부에서 고시하지 않고 중앙 일간지에도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째로 병합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독도를 편입하고 열강의 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동경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면 동경에는 한국의 공사관도 있고 한국 유학생도 많았으므로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져 우리나라의 강력한 항의를 받는 것이 두려웠다.
대한제국정부는 1906년 3월28일에 일본의 시마네현의 신서(神西)사무관과 은기도사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려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독도 편입 사실을 알렸다.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는 ‘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의 외양 백여리허에 있었는데… 자운(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自云 獨島 今爲日本領地故 視察次來島)’라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보고하였다.
내부대신 :‘독도가 일본 속자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참정대신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에 속하나…’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領地)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

독도의 위치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14분18초, 동경 131도52분20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했으나 2000년 4월8일부터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17번지로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약49해리: 최근 물이 빠졌을 때를 기준하면 87km임)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60km(약 86해리)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항으로부터 215km 지점에, 일본의 시마네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 220km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로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 6301평)이고 서도의 산 높이는 174m, 동도가 99.4m이다. 본토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로 떨어져 있고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8㎞로 떨어져 있다. 면적은 708㎢로 울릉도의 10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