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군역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기록한 진주만공습 74주기인 7일 하와이와 뉴욕 등지에서 추모식(追慕式)이 열렸다.
1941년 12월7일 오전 7시55분 일본제국주의는 6대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450대의 전투기가 미해군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선전포고(宣戰布告)없이 공습했다.
기습을 당한 미국의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정박(碇泊)해 있던 7척의 미군 전함중 5척이 격침되고 300여대의 항공기가 파괴됐다. 특히 아리조나 전함은 피격 9분만에 침몰해 1177명이 수장되는 등 진주만 공습으로 총 2400여명이 사망하고 1700명이 부상을 입었다.
74년이 지난 지금도 진주만 바다 밑엔 아리조나함의 잔해가 잠겨 있다. 미국이 첫 공격을 당한 오전 7시55분 하와이 진주만에서는 74주기 추도식이 생존장병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뉴욕에서도 2차대전 당시 항공모함이었던 86번 부두의 인트레피드호 뮤지엄에서 추모행사가 거행됐다.
미태평양함대 해리 해리스 사령관은 이날 기념사에서 "7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진주만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 안보와 번영, 평화를 위해 경계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무력화한후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점령했으나 2차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었다. 이튿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12월 7일을 불명예의 날로 선언하고 보복을 다짐했다. 사흘뒤 미의회는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7일 "진주만 공습을 들은 미국민들은 격앙됐고 각지에서 군에 입대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속출했다. 뉴욕의 모병소엔 1917년 1차대전 참전기록의 두배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모일만큼 뜨거운 열기속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도 미 본토가 위협받을 것을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일몰후 15대의 적기로 구성된 두 개 편대가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인근과 샌프란시스코 북쪽 상공으로 날아왔고 자정에 또한번 영공을 침범, 3차례나 공습경보가 발령됐다"고 전했다.
타임은 "비록 적기가 폭탄을 투하(投下)하지 않고 돌아갔지만 캘리포니아의 미국인들은 런던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본토 역시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일본과의 선전포고이후 미국 정부는 미국내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한편 미국의 선전포고이후 재미한인들도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 것을 요청, 이듬해 4월 18세부터 64세의 한인 50명을 주축으로 중국인과 필리핀인도 가세
하여 동양인 대대 맹호군(대대장 김용성)이 창설(創設)되기도 했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