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의 한인들이 쿠바의 '애니깽' 후손들을 찾아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전달하는 여행을 가져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
한인미디어 코리안뉴스 발행인 이덕일씨를 비롯, 한인 14명은 최근 쿠바의 까르데나스와 마탄사스, 아바나 등 3개 도시에 거주하는 한인후손들을 찾아 특별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지난 수개월간 캐나다와 한국 등에서 모은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들고 쿠바로 날아가 한인 후손 가정들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이덕일씨는 5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999년 선교차 쿠바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16년간 현지에서 한인가정들을 돌본 밴쿠버 교민 이일성, 이진남씨 부부의 사랑에 동참하게 됐다"고 이번 여정을 소개했다.
그는 "쿠바의 한인은 한국 이민 역사상 가장 슬픈 삶을 산 이민자들이다. 이일성, 이진남씨 부부는 같은 도시에 살아도 서로 모른 채 흩어져 있던 쿠바 한인들에게 한글학교를 열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등 구심점(求心點) 역할을 해왔다"고 전했다.
이덕일씨를 비롯한 밴쿠버의 한인들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쿠바 한인가정에 꼭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짐꾼을 자청했다. 모두가 선물로 가득한 이민가방 한 개 씩을 들고가는 사랑의 산타가 된 것이다.
쿠바의 한인이민역사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로 애니깽(선인장) 농장으로 이민간 1천여명의 한인중 228명이 1920년 쿠바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멕시코 노동이민은 당시 일본이 하와이에 한인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위해 달콤한 허위광고로 인력송출 지역을 바꾼데 따른 것이었다.
애니깽 농장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착취에 눈물짓던 한인들은 1909년 가까스로 강제노동에서 벗어나 일부는 돌아갔으나 일본의 식민지(植民地)로 전락한 조국의 운명에 많은 한인들은 멕시코에 정착했고 일부가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으로 또한번 기구한 두 번째 이민을 하게 됐다.
낯선 땅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쿠바의 한인들은 최초 한인회인 대한국민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의 문화와 음식, 풍습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속에 현지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쿠바의 공산화이후 잊혀진 땅, 금단(禁斷)의 땅으로 남아야 했다.
현재 쿠바의 한국계 인구는 1050여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할아버지와 부모 세대만 해도 유창하지는 않아도 한국말을 하고 한국 문화와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에 비하면 쿠바의 젊은 한인들은 상당 부분 정체성을 잃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밴쿠버한인사회와 같은 미주 지역 동포들이 기울이는 노력과 수년전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열풍으로 인해 쿠바 젊은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조국을 그들의 가슴속에서 불지피고 있다.
지난 2008년과 2010년에 쿠바를 방문했던 이덕일 씨는 "쿠바에서 강남 스타일 노래를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쿠바 한인뿐만 아니라 쿠바인들도 강남 스타일을 춤추는 걸 보면 한국이 무척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쿠바 최대 방송국인 카날 아바나와 쿠바 비시온 등 공영 방송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아바나 시내에서 USB에 담겨 판매되는 한국 드라마를 본다.
첫 방문지인 까르데나스에서 밴쿠버 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일이 있었다. 만남의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식사할 그릇도 놓고 의자도 정리하고 있었는데 한인 후손중 한 명이 커다란 태극기를 꺼내와 벽에 거는 것이었다.
이덕일 씨는 "우리 말도 잘 못하는 젊은이가 정성껏 태극기를 거는 모습이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사실 이들의 선조는 인천항에서 멕시코로, 또 쿠바로 왔으니까 고향이 남쪽인 셈이다. 몰랐던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사회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이 사실을 연관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쿠바의 젊은 한인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한국의 태극기 앞에 서서 부모의 조국을 기리는 있었다. 아직 이곳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당당하게 공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후예(後裔)들이었다.
코리안뉴스에 따르면 현재 쿠바엔 이민 3-6세대가 한인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오랜 세월속에 성도 변화 되었다. 초기엔 39개의 성씨가 있었지만 이씨는 Li(리), 한씨는 Jan(얀), 김씨는 Kin(킨) 또는 King(킹), 강씨는 Kan, Can (칸)으로 변했다.
한인들은 1921년 6월 마탄사스에서 한인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고, 마탄사스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7년 한인회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등록 회원 수대로 매년 내야 하는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쿠바 정부가 사조직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쿠바 한인 커뮤니티'라는 비공식적인 이름의 한인회가 한인 후손들을 찾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바 한인 커뮤니티 회장은 아바나에서 살고 있는 김시열(Antonio)씨가 맡고 있다.
쿠바 한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임천택씨다. 그는 초기 쿠바 한인들의 삶과 역사를 글로 남겼다. 그의 딸 마르타 임 김(Martha Lim Kim) 교수는 마탄사스 교육대학 철학교수로 20년간 봉직하다가 93년에 은퇴한 쿠바의 대표적인 한인 지식인이다.
마르타 임교수는 남편인 쿠바의 역사학자 라울 루이스와 함께 아버지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쿠바의 한인들(Cubano Coreano)'이라는 역사책을 저술했다.
이덕일씨는 "쿠바의 가난은 부족이다. 그리고 모두 가난하다. 우리 일행이 밴쿠버와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간 준비한 생활용품을 나누어 주었지만 부자가 빈자에게 베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 나누어 준 의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일성씨 부부가 자존심 강한 쿠바의 한인들에게 선물을 주고, 그들이 선물을 기꺼이 받겠다고 하기까지 조심스럽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후문이다.
카를로스 아내 셰일라는 밴쿠버 한인들이 준 선물가방에서 아기옷과 장난감을 꺼낼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곧 아빠가 되는 카를로스는 어쩔줄 몰라하는 아내 곁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덕일씨는 "아마도 카를로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한국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애국도 주고받는 것이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더 이상 할아버지들의 나라가 아니라 카를로스의 나라라는 것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쿠바의 한인들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꼬깃꼬깃 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 활동 자금을 보냈다. 대한민국이 6·25 참전 용사를 끝까지 책임지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동포사회와 대한민국의 특별한 관심을 당부했다.
뉴욕=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다시 찾은 우리의 형제- 쿠바의 한민족
헤밍웨이가 매일 마셨다는 모히토를 벌써 몇 잔이나 들이켰는지 모른다. 지난 1주일간 쿠바의3개 도시(까르데나스, 마탕사스, 아바나)에서 살고 있는 한민족을 만난 일정을 끝내고 오늘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다. 모히토의 힘을 빌어-헤밍웨이도 그랬을지도 모를- 머리를 짜 내려고 하였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쓸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며칠째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들의 모습과 이 많은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왜곡 없이 사실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가 어려워서이다. 나의 이번 여행은 한인 이민사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쿠바의 한인을 찾아가 그 동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으며 쿠바 내에서도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우리의 한민족을 다시 찾아 모은 이일성, 이진남씨 부부의 결코 짧지 않은 지난 10년간의 족적을 느끼는 것이었다.
쿠바에 대한 선입견(先入見)을 가진 독자, 혹은 앞으로 이들을 만나게 될지 모를 독자에게 다짐을 받아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이념, 즉 이데올로기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통일의 제일 장애요소 역시 결국 양쪽의 정치적 욕심과 함께 이제는 찾아보기 조차도 힘든 이념이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 세계를 양분 하였던 이데올로기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도, 구 소련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다. 더 이상 끝이 보이는(그리고 없는) 이념을 가지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의 도움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근 100년을 지내온 그들에게 얼마를 더 기다리라는 말인가? 우리 동포는 우리만이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쿠바동포의 가난과 우리의 가난은 관점과 정도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우리의 가난과 쿠바의 가난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의 가난은 부족이다. 그리고 모두 가난하다. 우리의 개개인이 느끼는 정도가 다른 상대적 가난이 아니다. 이번에도 우리일행이 가서 밴쿠버와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간 준비한 생활용품을 나누어 주었지만 이것이 부자가 가난한자에게 나눠줬다고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형제 자매에게 나누어 준 의미일 뿐이다. 형제와 나눈 것에 공치사 할 필요가 있는가? 사실 이일성씨 부부가 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선물을 기꺼이 받겠다고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을 기다리고 지내면서 조금씩 조심스럽게 다가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 약속을 남발(濫發)하지 말아야 하겠다. 어렵게 고국의 형제들에게 마음을 연 이들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동안 동포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찾아 와서는 이런 저런 약속을 하고 가고는 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언급도 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이들도 고국에서 온 동포라고 해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 왔다. 어렵게 오랜 기간을 통해 얻은 이들의 신임을 아픔으로 다시 내 몰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의 부족한 것이 불행한 것은 결코 아니므로 섣불리 감정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와서는 학용품이나 건네주는 사진을 찍고 돌아와서 대외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책임 없는 행동은 절대 삼가야겠다.
마지막으로 동포 사회에서 우리 민족은 100% 한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100% 혈통을 지닌 한인도 오랜 세월을 기후와 관습이 다른 이국에서 사는 동안 모습이 변한다. 그들의 자손이 100% 한인일 수 만은 없는 것이다. 한인 교포 사회에서의 한인은 가장 관대한 혈통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왜 힘 있는 나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에게서는 국적하고는 상관없이 단 0.몇%라 해도 한국혈통이 있으면 우리 동포라고 하지 않는가. 그 정도 개념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동포의 개념도 다시 가져야 할 것이다. 몇몇 고국의 언론사들이 ‘모든 유혹과 강압을 견뎌내고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한평생을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온 아무개 씨>’ 식의 보수적 개념의 동포 의식도 버려야겠다. 그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재로 살아가려면 서류적 의미인 국적은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 우리의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국적, 혈통을 관대하게 포용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동포는 금발일 수도 갈색 피부일 수도 있으며 그들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글| 사진: 이덕일 코리안뉴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