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19>
철거앞둔 광화문의 비감한 처지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이혼(離婚)! 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누구든지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보통 친구도 오래 사귀다가 떠나게 되면 섭섭하거든 하물려 소위 부부의 관계를 맺고 살던 사람이 서로 갈린다 함은 어디로 보든지 좋지는 못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1924년 3월 26일 동아일보 기사다. 무려 백년전 기사이지만 지금이라해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믿기 힘들지만 백년전에도 이혼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기사에 따르면 1923년 경기도 기준, 결혼의 수는 2만2천여건이었고 이혼은 20분의 1인 1천여건으로 나타났다. 더하여 '이혼을 새로운 도덕을 세우려는 용기'라는 신문의 주장은 실로 파격적이다.
“『엘빈.케이』라는 서양의 여장부는 『이혼은 당연한 일이요 도덕상으로 보아서도 착한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혼은 행복되지 못한 한 가정을 깨트려서 행복스러운 두 가정을 만들게 되므로』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행복되지 못한 – 아무리 해도 유지해 가기 어려운 부부 관계를 소위 도덕이니 체면에 억매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대로 계속한다 함은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고통과 죄악이 될 뿐이다. 조선에도 이혼이 늘어간다 함은 곧 조선 사람도 행복을 구하여 새 도덕을 세우려는 용기가 늘어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주목할 현상이리오!”

최근 광화문 앞 월대(月臺) 복원공사가 마무리됐다. 월대는 궁궐이나 건물 앞에 놓인 넓은 기단(基壇)으로, 각종 의식 등에 이용하던 장소다. 광화문 앞 월대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국왕이 드나들면서 백성과 소통하고 화합하던 공간이었으나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후신 중앙청) 건물을 세우며 경복궁 내 수많은 전각들을 헐었고 월대는 물론, 광화문까지 치워버렸다. 일제는 광화문을 아예 철거하려 했으나 극심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마지못해 경복궁 동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았다. 광화문은 1950년 6.25전쟁 때 포탄을 맞아 문루(門樓)는 소실되었고 석대(石臺) 및 석축(石築)만이 남았는데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68년 석축 윗부분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경복궁 정면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문 위치가 뒤틀리고 고증도 엉터리였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김영삼 대통령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10년 광복 65주년에 광화문을 제 자리에 복원할 수 있었다.
1924년 3월 2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 건축의 정화(精華) 광화문은 장차 어디로?’라는 기사에서 광화문이 근대양식의 총독부 건물과 부조화하다는 이유로 철거를 합리화하고 다만 역사적 건물이니 불국사의 경우처럼 다른 곳에 이전하는게 좋다며 짐짓 생각해주는 투의 내용을 보도했다. 참으로 비참했던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느껴진다.
한편 3월 31일 동아일보는 ‘민중의 반항-조선 경찰의 쌓이고 쌓인 죄악’ 제하의 기사에서 당시 조선 경찰이 구타와 고문 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등 극악무도한 인권유린을 고발하며 “당국자는 『반항(反抗)』을 악(惡)이라 하여 압박할는지 모른다. 횡포 무리! 불법 고문! 인권 유린! 이 세 가지는 조선 경찰의 일과이다. 사람 때리는 경찰, 인권 무시하는 경찰은 조선에만 있는 경찰인 동시에 조선 안에는 아무리 궁벽한 산간 소촌에라도 없는 곳이 없다.. 무고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아픔을 당하였던고. 그중에는 매 끝에 죽은 원혼도 많았을 것이요 억울하게 품은 원한도 많았을 것이다. 당국자는 『반항(反抗)』을 악(惡)이라 하여 압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반항은 『하는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는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라며 준엄히 질타(叱咤)했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해당 기사와 고향을 떠나 만주로 대거 이주하는 당시 조선인들의 모습 등 백년전 소식들을 소개한다.
☯ 주목할 이혼(離婚) 증가 (1924.03.26.) 동아일보
새 도덕을 구하는 새 현상

◊ 작년 1년 동안에 경기도 관내에서 결혼한 수효는 전부 22,238건인데 그중 조선인은 21,734건이요 이혼한 수효는 1,030건인 바, 그중 조선인은 954건이요 이혼 수는 재작년보다도 훨씬 증가되었다 한다.
◊ 작년에 954건의 이혼이 있었다 하면 금년에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 이혼(離婚)! 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누구든지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보통 친구도 오래 사귀다가 떠나게 되면 섭섭하거든 하물려 소위 부부의 관계를 맺고 살던 사람이 서로 갈린다 함은 어디로 보든지 좋지는 못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의 속담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먹기 싫은 음식은 개에게나 주지, 보기 싫은 사람은 어찌 할 수 없다』고
◊ 『엘빈.케이』라는 서양의 여장부는 『이혼은 당연한 일이요 도덕상으로 보아서도 착한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혼은 행복되지 못한 한 가정을 깨트려서 행복스러운 두 가정을 만들게 되므로』라고 말하였다.
◊ 그렇다. 행복되지 못한 – 아무리 해도 유지해 가기 어려운 부부 관계를 소위 도덕이니 체면에 억매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대로 계속한다 함은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고통과 죄악이 될 뿐이다.
◊ 조선에도 이혼이 늘어간다 함은 곧 조선 사람도 행복을 구하여 새 도덕을 세우려는 용기가 늘어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주목할 현상이리오!
☯ 조선 건축의 정화(精華) 광화문은 장차 어디로? (1924.03.26.) 매일신보
이조(李朝) 500년의 고적(古蹟)
경주 불국사 같이 달리 이전하여
영구적 보존 방법을 강구할 모양

조선 건축의 특유한 유창한 선(線)과 이조 500년 역사를 전하고 있는 경성의 유수한 고적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 안에 짓는 총독부 신청사가 낙성되는 날에는 할 수 없이 철폐하기로 결정된 모양 같다. 이 경복궁의 정문이요 반도 문화를 상징하는 피(血)와 고역(苦役)으로 건설한 역사적인 이 건물을 치워버리기로 결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考慮)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원인의 하나를 들은 즉, 근대 양식으로 굉장히 지은 신청사 앞에 고색이 창연한 건물이 서서 서로 흘기고 있는 것은 첫째 외관(外觀)의 조화를 잃을 뿐 아니라 마치 신청사가 광화문을 정복한 것 같아서 보는 자에게 일종의 불쾌한 감을 느끼게 할 것이요, 또 출입이 빈번할 총독부의 정문으로는 너무 협착하여 적지 않은 불편을 느끼리라는 이유인데, 아직 광화문을 치워버리기로 확정한 것은 아니나 만일 그것이 실현되는 날에는 적어도 근래 조선 미술 건물 등이 각처에 퇴폐해 가는 오늘에 이 역사적 건물을 헐어버릴 이유는 만무할 것이요, 경주의 불국사와 북청(北靑)의 남문(南門)과 같이 다른 곳에 이전하여 영원적으로 보존 방법을 강구하리라더라.
☯ 쫓겨가는 조선인 (1924.03.27.) 동아일보
직업은 여하(如何)

농업을 천직으로 삼는 조선 사람이 토지가 광비(廣肥)한 만주로 몰려가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행(幸)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보호해 줄 기관을 갖지 못한 그네들은 중국인의 농노(農奴)밖에는 될 것이 없다.
직업별 | 안동현(安東縣) | 봉천(奉天) | 합이빈(哈爾濱) |
농업(農業) | 15,468명 | 65,285명 | 6,603명 |
아편(阿片)매매 | | | 649명 |
상업(商業) | 395명 | 862명 | |
일용가(日傭稼) | | 165명 | |
공업(工業) | 117명 | 108명 | |
잡업(雜業) | 132명 | 107명 | |
노동(勞動) | 258명 | | 88명 |
잡화상(雜貨商) | | | 112명 |
곡물상(穀物商) | | | 46명 |
여관(旅館) | 159명 | | 59명 |
음식점(飮食店) | | | 20명 |
작부(酌婦) | | | 35명 |
교원(敎員) | | | 19명 |
재봉(裁縫) | | | 14명 |
불명(不明) | | | 500명 |
기타 | 54명 | 111명 | 8 |
무직(無職) | | 100명 | 63명 |
계 | 16,583명 | 66,738명 | 8,216명 |
☯ 민중의 반항 (1924.03.31.) 동아일보
조선 경찰의 쌓이고 쌓인 죄악

◊ 소작 운동으로 기세가 맹렬한 전라남도 순천(順天) 지방에서는 지난 24일에 12개 단체가 모여서 경찰 성토(聲討)대회를 열고 『인민을 함부로 구타하여 생명과 인권을 보전할 수 없다』는 의미로 순사나 형사의 불법구타, 고문 등 사실을 일일이 적발하여 통론(痛論)하였고, 마침내 경찰서장에게 『관계 경관은 시민대회에 사죄하라』는 통고문까지 보냈다 한다.
◊ 횡포 무리! 불법 고문! 인권 유린! 이 세 가지는 조선 경찰의 일과이다. 만약 허리에 칼을 차고 이따위 행투를 아니 하면 손발이 근질근질하고 마음까지 꺼름직한 모양이다.
◊ 사람 때리는 경찰, 인권 무시하는 경찰은 조선에만 있는 경찰인 동시에 조선 안에는 아무리 궁벽한 산간 소촌에라도 없는 곳이 없으며, 이 경찰은 이미 시행된 지가 적어도 15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를 가졌다.
◊ 적어도 15년 동안에 무고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아픔을 당하였던고. 그중에는 매 끝에 죽은 원혼도 많았을 것이요 억울하게 품은 원한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백성은 너무도 유순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오래동안 어직 참았을 뿐이다.
◊ 그러나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도 아무리 참을성 있는 백성이라도 어느 때든지 한번 반항의 기(旗)를 들게 되는 때는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땅은 반항의 기세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이번 순천 사건도 어찌 반항의 일례가 아니리오.
◊ 소이 당국자는 『반항(反抗)』을 악(惡)이라 하여 압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반항은 『하는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는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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