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LG하우시스는 사진에 관심 많은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20명을 선발하여 독도를 직접 탐방하고 다양한 독도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홍보 할 예정이라고 29일 밝혔다.
오는 6월 1일부터 14일까지 서류 접수를 통해 1차 인원을 선발한 후 인터뷰를 통해 7월초에 최종 탐방단을 구성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에 선발된 대학생들은 오는 8월 1일부터 독도를 직접 방문하여 서 교수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번 일을 기획한 서 교수는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이기에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접근하기 보다는 문화, 예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전했다.
또한 서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는 '사진'이라는 문화예술 컨텐츠를 통해 세계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야후의 플리커, 구글 플러스의 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올려 SNS로 널리 홍보하는 방식이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아들인 사진작가 홍인근 씨가 동행하여 대학생들에게 사진 관련 특강 진행 및 독도 사진에 관한 조언자 역할을 할 계획이다.
홍 작가는 "20명이 찍은 독도사진 중에 잘나온 사진들을 선발하여 국제사진 컨테스트 및 각 나라 대표 여행사진 공모전 등에 출품하여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섬'임을 함께 소개할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또한 서 교수는 "향후 국내 대학생들 대상을 넘어 한국에서 유학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따로 선발하여 외국인들 입장에서의 독도 모습을 사진으로 자연스럽게 담아 전 세계에 또 홍보 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 교수와 함께 이번 일을 기획한 LG하우시스는 지난 2009년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친환경 건축자재를 활용해 독도주민 및 경비대원들의 생활환경을 꾸준히 개선해 왔고 대학생들을 매년 선발하여 '독도사랑 청년캠프'를 개최해 왔다.
정현숙기자 newsroh@gmail.com
<꼬리뉴스>
독도의용수비대의 역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은 전란을 틈타 세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독도에 무단 상륙,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다. 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나 부상으로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洪淳七)과 울릉도에 살고 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다.
무장 및 장비들은 대장이자 당시 울릉도 최고의 부자였던 홍순칠(洪淳七)이 직접 부산으로 찾아가 오징어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으며, 결성 이후에는 대원들의 모금을 통해 구입하였다. 또한 경북도경(울릉경찰서라는 이야기도 있다)에서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개런드로 무장했다. 이후 목재, 전답, 산을 팔아서 계속 군자금을 보충했다.
대장은 홍순칠 본인이 맡았으며,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으로 기록되었다.
•수비대 대장 - 홍순칠
•수비대 부대장 - 황영문
•제1전투대 - 대장 서기종
•제2전투대 - 대장 정원도
•후방지원대 - 대장 김병열
•교육대 - 대장 유원식
•보급대 - 대장 김인갑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첫 전투이다.
•1954년 6월 홍순칠 대장 등은 독도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같은 해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 같은 해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 1대와 총격전을 벌여 역시 격퇴하였다. 여담으로 이 때 독도의용수비대는 당시 일본 순시선에 비해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대는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가짜 대포를 만들어 일본 함선의 눈을 속이는 기지를 발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하지만 개인이 군대를 꾸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수비대 유지에 날려버린 홍순칠은 계속 자신들의 업무를 정부에서 맡아주길 요청했지만 정부에선 근무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난색을 표하기만 했고 배속된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한때 홍순칠이 해적이란 주장이 제기되어 홍순칠을 주한미군이 체포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다. 홍순칠은 자신이 전 재산을 바쳐 독도를 지켰다고 국회의 청문회에서 강변했고 청문회는 홍순칠에게 동정적으로 바뀌어 정부가 뭘 했길래 애국자를 해적으로 몰았냐고 내무, 외무, 국방장관에게 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러 홍순칠은 석방되었다.
1956년 12월 30일 마침내 기존의 업무를 국립경찰 소속 독도경비대에 인계함으로서 이들의 기나긴 임무는 끝이 났다. 이 공로로 홍순칠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을,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수여받았다. 10명의 의용수비대는 경찰 소속으로 전환하여 그 뒤로도 근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뒤에도 이들은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의 독도 지키기 및 독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방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짐을 가져다 주던 중에 대원 한명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독도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하여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하여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다.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다행히 한국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96년 4월 고(故) 홍순칠 대장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했다.
<자료출처 앤하위키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