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34>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의열단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고 광복을 위해 무력과 암살 등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이다. <자료 위키백과>
의열단 투쟁사
1920.9.14: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12.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
1921.9.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3.28: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1.12: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1924.1.5: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1924.6.1: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
1924.6.: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 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
1924.6.7: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
1926.12.28: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
1927.8.1: 의열단 난창폭동에 참여.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다.
의열단의 투쟁은 김지섭의사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는 당해 1월 5일 일왕이 사는 도쿄 궁궐앞 ‘이중교(二重橋 니쥬바시)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를 경악케 한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사진을 처음 싣고 사건 내용을 보도했다.

김지섭 의사 <동아일보>
김지섭 의사는 1885년 경상북도 안동군(지금의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추강(秋岡)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했다. 의열단 가입후 1923년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하고자 하였으나 휴회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자, 1924년 1월 5일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바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2월 20일 뇌내출혈로 42세에 순국했다. 40대 초반에 옥중에서 왜 돌연 뇌출혈이 왔을까. 혹독한 고문은 없었는지, 모종의 실험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운 의혹만 남는다.
4월 26일 조선일보는 ‘성황의 형평사(衡平社) 기념식’을 보도해 눈길을 끈다. ‘형평사’는 조선시대 소잡는 일을 하는 백정(白丁)들이 인간이하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10만명이 모여 ‘형평’의 깃발을 높이 걸고 세운 조직이다. ‘형평’이라 함은 ‘균형을 맞추다’는 뜻이다. 인간으로서의 ‘평등’을 외치지 못하고 ‘형평’이라는 완곡한 단어를 써야 했던 현실에서 백정계급이 얼마나 인권을 유린당했는지 짐작이 간다.
4월 27일 동아일보는 동척(東拓 동양척식)회사 토지가 6,891,691평이나 되고 일본인만 1,062명이 살게 된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에 기자를 특파해 사리원 발로 생생한 현장기사를 실었다.
“소작권 때문에 금년도 역시 말썽이 되어 살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는 현장에 출장을 하였다...소작인들 중에서도 일본 사람은 살기 좋은 상평으로 조선인은 아래 끝으로 피차 교환하는 동척 회사의 혹독한 방침에 대하여는 위의 보도와 같거니와, 면장 최제박(崔濟珀)씨의 말을 듣건대, “조선 사람 60호와 일본인 30여 호를 피차 교환한다고 하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며, 교환하는 데도 조선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간답니다.” 할 뿐이요 차마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이 헛웃음만 친다. 모씨(某氏)는 말하되 “소작인 치고 빚 없는 사람은 없소” 하며 “소작 계약을 할 때 돈 갚을 계약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갚을 계약을 안 하면 아니 될 형편이니까요” 하며 누구를 저주하는 듯이 비분한 기색을 타나낸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 이중교(二重橋) 폭탄 범인은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 (1924.04.25.) 동아일보
작년 9월 1일 진재(震災)때 조선인 학살이 도화선으로
일본 상하를 경악케 한 대 사건 발표

☯ 의열단의 공판 (1924.08.29.) 동아일보
http://www.19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37
☯ 성황의 형평사(衡平社) 기념식 (1924.04.26.) 조선일보
지방 대표 400~500명이 모여
내빈도 많아서 회장이 대 만원


어제 25일은 우리 조선에 있는 백정(白丁)이라는 이름을 쓰고 모든 유린(蹂躪)과 압박을 받으면서 완전한 인권을 발휘치 못하고 천부적의 평등 대우를 얻지 못하여 많은 설움과 원한을 품고 항상 분한 눈물로 근근이 살아오던 소(牛) 잡는 영업을 하던 사람들로, 근래의 물 밀 듯이 들어오는 새 사조(思潮)를 따라 신성한 인권을 회복하여 참다운 사람의 행복스러운 생활을 해 보고자, 조선 동족에게 대하여 『나도 살아봅시다』하는 소리를 치고 일어난 10만 백정으로 단결된 형평사의 창립 기념일인데, 시내 도렴동 144번지 형평사에서는 이 날을 기회로 어제 오후 1시부터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형평사 창립 1주년 기념 축하식을 거행하였는데, 당일 회장의 문 앞에는 찬란한 형평기(衡平旗)를 높이 세운 속으로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원들은 400~500명에 달하였으며, 내빈과 방청객은 구름같이 모여들어 넓은 회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어서 대 성황을 이룬 가운데 정각이 되자 장지필(張志弼)씨가 개회를 선언하고 순서에 의하여 군악대의 유량(嚠喨)한 주악이 있은 후에, 장씨로부터 감개무량한 式辭가 있었으며, 이어서 또 장씨로부터 연혁 보고가 있었으며 그 다음에는 축사를 하려 하였으나 당국의 금지로 인하여 중지되고, 그 다음에는 각지로부터 온 축전과 축사 20통을 낭독하고 그 외 사원의 소감과 폐회 주악이 있은 후 여흥으로 지정신(池貞信)양의 독창과 조선여자강습원에서 온 소녀 2명의 보기 좋은 무도(舞蹈)가 있었다더라.
경계는 엄밀(嚴密)
삼륜(三輪) 고등계주임 이하 7~8명이 임장(臨場)
당일 회장에는 관할 종로 경찰서에서 삼륜 고등계 주임 이하 7~8명의 경관이 임장하여 염중 경계하였더라.
☯ 미인계의 호소식(好消息) (1924.04.26.) 조선일보
미화수(美化水)의 출현

전에 있던 무슨 화장수보다도 훌륭한 화장수가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귀부인 제위는 일차 시용(試用)하시와 끝끝내 애고(愛顧)해 주시옵소서.
이 미화수를 항상 바르시면 살이 터지지 않고 살결이 고와집니다. 기타 여드름, 땀띠, 죽은깨, 버짐 등에 효험이 있아오며 분 바르시기 전에 바르시면 분이 곱게 먹고 잘 퍼지는 신통한 약입니다.
한 병 정가 30전
각처 잡화점에서 판매합니다.
경향 가지 특약 판매점 모집
경성부 서대문정 1정목 159
동영상회(東英商會) 근제(謹製)
☯ 문화정치의 가면(假面)을 공개하는 것만은 고맙소 (1924.04.26.) 조선일보

『발진지부쓰』가 조금씩 침식되니까 이번에는 여러 가지 집회에 대한 해산(解散) 또는 금지병(禁止病)이 한창 유행한다. 노농총동맹을 위시하여 청년총동맹까지 모조리 해산을 하더니 병세는 점점 만연되어 그제는 노농총동맹 사무소에 사람 여섯쯤 모여서 사무를 처리하고자 하였더니, 이것까지 신고없는 집회라고 검거까지 하였다고. 이러고 보면 학교나 은행에서도 날마다 신고를 하여야 될 터인가. 어차어피(於此於彼; 이렇거나 저렇거나 귀결되는 바)에 병이라면 낫기 전에는 주책없을 것이니까 멋대로 놀라지. 더욱 우스운 것은 일본 사람들이 주최하여 경성부에 대한 혁신(革新) 연설을 한다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조선인이 한 곳에 참례하여 들으면 재미없다는 것이라든가. 경성부청에서 잘못한 일도 조선 사람에게는 들려 줄 수 없다는 것이니까 『들려주지 못할 사실』은 정말 있는 것이지. 그 대신에 문화정치의 가면(假面)을 공개하는 것만은 고맙소.
☯ 경인 열차 하루에 13번 왕복 (1924.04.26.) 동아일보
오늘 5월 1일부터
열차 시간 변경과 함께 한 번씩 늘어

오는 5월 1일부터 조선 전선(全線)의 열차 운전 시각을 개정하는 동시에 경인선은 종래 하루에 기동차 6번 왕복까지 합하여 12번 왕복하던 것을, 기동차를 없애고 그 대신에 소형 기관차를 사용하여 13번으로 늘린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제 그 주요 정거장의 발착 시각을 보면 하루에 아침과 저녁에 두 번씩 왕복은 전과 같다 하며 시간은 아래와 같다고.

☯ 근고(謹告) (1924.04.27.) 동아일보
-. 취체역 사장 : 송진우(宋鎭禹)
-. 전무 취체역 : 신구범(愼九範)
-. 상무 취체역 : 이상협(李相協)
-. 취체역 ; 장두현(張斗鉉)
-. 취체역 : 김성수(金性洙)
등이 이번 사정에 의하여 사임하였으며 그 외 취체역은 경성에 부재(不在)이기 때문에 감사역 허헌(許憲)씨가 임시 주주총회에서 후임 결정되기까지 취체역의 직무를 집행하게 되었기에 이에 근고함.
4월 27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본인 등이 이번 사정에 의하여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취체역의 직임을 사(辭)하온 바, 취직 이래 직접 간접으로 원조 애호를 주신 제위에게 삼가 명감(銘感)의 미의(微意)를 표하나이다.
4월 17일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장두현(張斗鉉)
신구범(愼九範)‘
이상협(李相協)
☯ 동척(東拓) 이민에게 구축(驅逐)되는 농민 (1924.04.27.) 동아일보
살기 좋은 곳에서 살 수 없는 곳으로 날마다 쫓겨가는
황해도 재령 북률면 농빈의 참경(慘景)과
동척(東拓)의 무도(無道)

조선 사람 사는 곳치고 어느 곳을 말할 것 없이 비애와 불안에 싸이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동척(東拓) 회사 토지가 6,891,691평이나 되고 일본인만 1,062명이 살게 된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에 말할 여지도 없다. 해마다 문제되는 소작권 때문에 금년도 역시 말썽이 되어 살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는 현장에 출장을 하였다. 즉시 그곳 면사무소를 방문한 바 최근 조사표를 말하면 조선인은 동척 토지를 매호(每戶) 평균 1정(町) 7반보(半步)를 부치고, 일본인은 매호 평균이 2정 2반보를 부친다고 한다. 1914년도부터 52호의 이민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 1923년까지 239호가 된다는데, 금년에는 뜻도 못 한 방침이 생겼다는 바 그 내용을 들은 즉 하평(下坪) 즉 말하면 수해와 한재(旱災)가 들기 쉬운 곳에 있던 이민은 상평(上坪) 즉 살기 편한 곳으로, 그대신 상평에 살던 조선 사람은 하평으로 피차 교환을 시키는 것인데 조선 사람에게는 이사비도 돈 100원과 집터로 200평을 대부한다고 하나, 방금 농사를 착수할 이때에 집을 팔 수도없거니와 집을 세울 사이도 없으며, 이왕 작정한 하평에 살던 일본인에게 주려고 뗀 60여 호의 소작인들은 아직도 확실한 작정이 없이 주저하는 사람이 많다 한다.
저주할 이상촌(理想村)
그들의 기세
같은 면 내에 사는 소작인들 중에서도 일본 사람은 살기 좋은 상평으로 조선인은 아래 끝으로 피차 교환하는 동척 회사의 혹독한 방침에 대하여는 위의 보도와 같거니와, 면장 최제박(崔濟珀)씨의 말을 듣건대, “조선 사람 60호와 일본인 30여 호를 피차 교환한다고 하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며, 교환하는 데도 조선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간답니다.” 할 뿐이요 차마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이 헛웃음만 친다. 이에 대하여 모씨(某氏)는 말하되 동척 회사의 장래 방침은 25만 원을 들여 간이(簡易)한 수도를 놓고 간이도로로 고친 후 이상촌을 만들 작정이라 하며, 발길을 돌려 해마다 소작 계약을 받는 동척 회사 주재소 앞에 모인 소작인들의 말을 들은 즉, “소작인 치고 빚 없는 사람은 없소” 하며 “소작 계약을 할 때 돈 갚을 계약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갚을 계약을 안 하면 아니 될 형편이니까요” 하며 누구를 저주하는 듯이 비분한 기색을 타나낸다.
편리하게 정리한다고
뻔뻔스러운 동척 사원의 태도
기자는 다시 동척 회사 주재소장 죽내(竹內)씨를 방문한 후 의견을 들은 즉, 상“평은 이민을 살게하고 하평에는 소작인을 살게 한 바, 이와 이사하기로 작정한 50호에는 집을 세워 준다” 하며 “모든 것을 차차 정돈하여 농사하기에 편하고 쉽도록 극력 힘 쓰겠다.“하며 매우 활발한 태도로 말하더라. (사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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