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임지환 기자 nychrisnj@yahoo.com
1954년 1월 23일 제주 조촌읍 북촌리에서 장례가 벌어졌다. 군대에 갔다가 사망한 마을 청년의 장례식이었다. 시신대신 죽은 이의 옷을 꽃상여에 넣어 고인이 생전에 살았던 곳과 놀던 곳을 찾아다니는 마을의 오랜 풍습인 ‘꽃놀임’을 하게 되었다.
꽃상여는 생전이 고인과 인연(因緣)있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다가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갔다. 상여를 맨 마을사람들은 마지막 의식을 치르다가 5년전 그곳에서 있었던 참혹한 죽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1949년 1월17일 아침, 함덕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이 무고한 마을 주민 1천여명을 북촌 초등학교로 끌고가 경찰가족과 군인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를 30~50명씩 끌고가 무려 436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그날의 비극을 떠올리며 동네 사람들은 “우리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술한잔 씩 따릅시다”며 누구랄 것도 없이 잔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중에 유족이 아닌 사람들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술을 따르며 누군가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막힌 가족들의 죽음에 설움이 복받쳐 “아이고”하며 목을 놓고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하며 대성통곡(大聲痛哭) 하는 소리는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경찰에 까지 보고되어 마을 이장을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쓰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것이 ‘아이고 사건’이다. 대체 5년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4년 1월 초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에 주둔한 중대 병력 일부가 함덕으로 가던 중 마을 어귀에서 게릴라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졌다. 군인들은 동료 전사자의 시신(屍身)을 거리에 버려두고 본부로 돌아갔다.
마을 연장자 여덟명이 시신을 수습하여 함덕리 대대본부로 찾아갔는데, 대대장이 없는 사이 하급 장교들은 시신을 들고 온 노인들을 모두 사살했다. 이후 이들은 가옥 300채를 불태우는 등 초토화시킨 다음, 주민 1천명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군인가족과 경찰가족들은 따로 나오게 한후 광란의 총살을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상급 지휘관의 명령으로 학살은 중단되었지만 이미 438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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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전시장 문구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지속된 대규모 학살사건이다. 일본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수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4.3 사건의 발단은 47년 3월 1일에 제주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한 것을 빌미로 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봉기로 일어났다. 당시 남한에는 미군정 체제로, 합법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로당 무장대는 제주 당국의 폭정과 남북한 총선거 문제가 최대 이슈로 떠오른 시대배경에서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단선, 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외쳤다.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남로당 지도부 6인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린후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제주 4·3 사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자료 위키피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