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정현숙기자 newsroh@gmail.com
재외동포재단(이사장 한우성)이 주최하는 ‘2018 재외동포 중고생, 대학생 모국연수’에 참가하고 있는 전 세계 각국 700여명 재외동포 차세대들이 29일 서울 종로 인사동 거리에서 99년 전 3.1 만세 평화운동을 재연(再演)하는 평화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가고 있는 재외동포 차세대들은 이날 탑골공원에서 민족극단 ‘우금치’를 통해 99년 전 3.1 운동 당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어 인사동 일대에서 태극기를 들고 3.1 만세 평화운동의 현장을 재연하는 의미 있는 행진을 펼쳤다.
재외동포 학생들은 일부가 유관순(柳寬順) 열사(烈士)의 모습으로 한복을 입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민국 100주년 국민이 주인인 나라’ 라는 등의 여러 가지 피켓을 들고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행진해 연도 시민들의 박수를 받고 카메라 세례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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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3.1만세운동 어떻게 시작됐나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그 배경은 여러 요인이 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일제의 무단 통치 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 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한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여운형은 중국 길림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만주 지린(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는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출국 전 김규식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또한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료 참조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