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 이윤정 씨 발표자료
조태건 불교문화연구소 유적연구팀장은 제1주제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유산 : 사업의 경과와 확인된 주요 피해 현황’을 발표했다. 조태건 팀장은 “한국전쟁은 국토 전역을 초토화시키며 불교문화유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면서 “외세가 아닌 우리 민족 스스로 가해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조 팀장은 “1.4후퇴시기 유엔군은 적이 사용할 수 있는 기간시설물, 민가 및 사찰을 대상으로 직접 불을 질렀고 북한군이 내려오는 북한 후방에도 대규모 항공폭격을 개시했다. 이과정에서 용문산 일대 사찰들과 남양주 봉선사 등은 주요 전각(殿閣) 대부분이 전소되었다”고 말했다.
제주지역과 전남북 일대에서는 전쟁 발발 전부터 군경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는데 피해를 입은 사찰이 63개소에 달했다. 전쟁 당시 서울 경기 이남 사찰 피해는 351건이 조사되었고 전소가 240건으로 가장 많고 부분피해 61건, 전쟁후 폐사가 20건이다. 특히 강원 경기 일대 사찰의 석불 비석 승탑 등 석조물에 탄흔(彈痕)이 다수 남아있는데 이는 군인들이 석조물을 대상으로 사격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민영규 교수가 1952년 실시한 경북 지역 문화재 피해 조사엔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1950년 12월 10일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국군이 주둔하며 200미터 거리 사격장에서 석불을 총격’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반면 오대산 상원사는 사찰 소각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한암스님의 목숨을 건 만류로 현장 지휘관이 마음을 돌려 화마(火魔)를 면했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전한 공군편대장 김영환 장군(1921-1954), 화엄사 소각명령에 각황전 문만 뜯어 소각한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사례도 있다.
주불전(主佛殿)의 피해는 없었지만 스님들의 생활영역이 소실 된 사례로 31육군병원 분원으로 활용된 통도사도 아픈 기억이 있다. 구하스님 기록에 따르면 6.25 사변후 군상이병 3천여명이 들어와 52년에 퇴거했는데 군인들이 경내에 머물면서 사찰 전각 일부가 훼손되었고 심지어 지장전을 교회건물로 사용하는 등 사찰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행위까지 저질렀다는 증언이 있다.
건봉사와 신흥사에서는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이 모두 소개(疏開)된 후 전각의 부재들이 난방용 화목으로 사용되었다. 가해 형태별 분석에는 전투(68)와 폭격(19) 보다 인위적인 소각(167)이 압도적으로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전환시대의 논리’ 등 명저로 70~80년대 냉전이데올로기를 깨는데 앞장선 故 리영희 교수의 일화에는 전쟁 당시 사찰에 대한 군인들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국군 보병 제11사단 9연대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 교수는 설악산 신흥사에서 병사들이 추위에 몸을 녹이기위해 불을 지필 때 불경 목판 더미가 타는 것을 목격했다. 리 교수는 즉각 지휘관에게 달려가 “귀중한 겨레의 문화재가 회진(灰塵)되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모든 경판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리 교수는 훗날 “불교신도도 아니고 종교도 없는 청년이었으며 신흥사의 문화사회적 가치를 아는 바도 없었지만 6.25전쟁에서 국군이 들어가는 곳마다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일삼는 것에 대한 젊은 장교의 책임감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리 장교의 기지(機智)로 구한 신흥사 경판은 은중경 법화경 다라니경 등으로 한자 한글 범어 세 언어로 된 귀중한 문화재다. 리 교수는 이같은 공로로 50여년이 지난 2002년 8월 조계종 총무원에서 표창장을 받았다.
조태건 팀장은 ”북한지역 사찰과 문화재에 대한 추가조사는 정부 부처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불교계 피해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불교문화유산 보존과 인재양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발표를 맺었다.
2주제는 권오수 순천대 학술연구 교수가 ‘한국전쟁 전후 불교계 희생자 기초조사와 향후 과제’ 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총 156명의 불교계 희생자를 확인한 이번 자료는 처음으로 한국전쟁 전후 불교계 희생자들을 조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한국전쟁 전후 불교계 희생자 명단과 직업별 분류 소속 사찰별 분류 등이 상세히 조사되어 눈길을 끌었다.
권오수 교수는 “이번 조사사업은 기독교계의 한국전쟁시기 기독교 탄압에 대한 피해규명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기존 과거사 진상규명이 국가폭력에 의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측면에서 전개된 것과 달리 기독교계의 활동은 ‘이념갈등’에 의한 피해를 규명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역사적 정합성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불교계 희생자 연구는 토대를 구축하고 활성화하여 공공의 관심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남정옥 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제3주제 ‘한국전쟁 관련 자료에 기록된 불교사찰 고찰’에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이었는지 실감나는 수치를 열거했다.
그는 “6.25때 들어온 직간접 병력이 무려 750만명에 달했다. 개전초기 1,120일 동안 한반도 상공에 비행기가 104만대다.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엔 미군 함정만 해도 428척이 투입됐고 유엔군 함정 90척에 우리 함정 50~60척 합치면 거의 600척이 에워싸고 함포사격을 했다. 미군이 하루에 보급했던 M1소총탄이 100만발, 기관총탄 50만발, 권총탄 20만발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9일간이었는데 유엔군이 22만발 중공군이 5만5천발을 소진(消盡) 했다. 전투가 끝나고 고지의 높이가 6m나 줄어들었을만큼 많은 포탄이 쏟아졌다”고 소개했다.
남정옥 전 연구원은 “6.25 전쟁은 하루에 쏟아부은 포탄량도 전무후무하지만 남한이 서울을 두 번 빼앗기고 북한이 평양을 한번 빼앗기면서도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못한 세계전사에서 유일한 전쟁이다. 그뿐인가. 한번은 낙동강까지 밀리고 한번은 압록강 두만강까지 올라가는 등 38선을 공산군과 유엔군이 서로 4번씩 넘었다. 온 국토가 전쟁터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불교사찰이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은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쟁 이전 사찰수와 관련, 1949년 6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한 전역 사찰수가 950개, 포교소 360개, 승려 5724명, 신도수 500만명인데 휴전 1년전인 1952년 6월엔 사찰수 879개 포교소 397개 신도수가 250여만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휴전 1년후인 1954년 7월엔 사찰수가 1,011개로 132개가 늘어난다. 이는 1952년 공비습격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 피해 여부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사찰 보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어나 정부 보조금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했다.
예를 들면 전등사 강진 무인사 해인사 등은 팔만대장경 존경각(尊經閣) 보존을 위헤 100만환이 지원됐는데 당시 가치로는 1만7천달러 상당이었다. 1949년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을 1만8천달러에 사온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지원이 아닐 수 없다.
남정옥 전 연구원은 “당시 전쟁으로 버거운 상황인데 문화재 보수에 그만한 예산을 투입한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한편 미공군의 오폭(誤爆)에 의해 완전 전소된 낙산사에 대해선 동해안지역 주둔 국군이 미8군의 자재지원으로 보수에 나섰고 성대한 준공식을 하기도 했다. 불교는 전쟁으로 참담한 피해를 겪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여론과 정부 지원 등에 힘입어 전통불교 확립에 힘쓰는 쇄신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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