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 부인 최준례여사의 비문
백범 김구(1876~1949)는 1924년 1월 1일 아내 최준례 여사(49)와 사별했다. 둘째아들(김신)을 낳은 후 폐병으로 중국 상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는 순간 제국주의 일본 군경에 체포되기 때문이었다.
그해 2월 18일 동아일보는 프랑스 조계 공동묘지의 최 여사 무덤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소개했다. 신문은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만나) 남이 격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멧천리 밧인(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씨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라며 "늙은 싀모(시어머니),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으랴!"라고 전했다.
그런데 비석에 아라비아 숫자를 대체한 한글 자음이 이채롭다. 마치 암호같은 이 표기는 비문을 새긴 조선어학자 김두봉의 생각이었다. 그는 1, 2, 3을 ㄱ, ㄴ, ㄷ으로 표기한 것이다. ‘묻엄(무덤)’이라고 표기한 것도 눈에 띈다
며느리를 먼저 보낸 김구 모친 곽낙원 여사는 1939년 중국 충칭에서 82세로 별세했다. 눈 감기 직전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여 귀국할 시는 나의 해골과 인이 모(최준례)의 해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매장해다오.”
1999년 4월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 봉분에 최준례 여사의 유해가 합장됐다. 백범 서거 50돌을 앞두고 둘째 아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 등 유족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의 뜻에 따라 남양주 가족묘지에 있던 최준례 유해를 이장한 것이다.
백년전 신문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한 당시 기사를 소개한다.

회포(懷抱)를 돕는 비석(碑石)
이 사진은 요즘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겪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 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碑)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40살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艱難)한 경우를 불쌍히 여겨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를 떨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이데, 조선 어학자 김두봉(金枓奉)씨가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섰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씨(郭氏·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49)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이는 큰아들 김인(金仁·5)이요 왼편에 있는 아이는 그 둘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늙은 시모(媤母),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이 누운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단기 4222년 1899년 3월 19일 탄생)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대한민국 6년(1924년) 1월 1일 죽음)
최준례 묻엄(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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