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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크게 두가지 방향입니다. 시론으로 주로 한반도 평화, 남북미 관계중심을 다루고 사회(산업)경제적 현안은 '제3섹타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쓰려 합니다. 한반도(김근태)재단 운영위원장 겸 이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현재고문, 사단법인 일촌공동체 창립자 겸 회장 변혁을 위한 연구기획법인. '다른백년' 이사장 역임. 주권자 전국회의 공동대표. 국민주권 연구원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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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은 일본 지키는 군사기지가 됐을까

문제의 근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글쓴이 : 이래경 날짜 : 2019-12-24 (화) 17:29:58

()왜 우리는 주한 미군 철수 얘기를 하지 않는가?

 

이제 <황해문화>에 게재된 글로 들어가 보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역사를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뻔히 알면서 그러는 것일까. 2019104일 그는 임시국회 개원일에 행정 수반으로 다음과 같은 소신표명 연설을 했다.

 

“(일본이 한) 제안의 진전을 전 미국의 1500만 유색인들이 주목하고 있다.”

100년 전 미국의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n)지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제안에 대해 그렇게 썼습니다. 1천만이나 되는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을 거쳐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이상, 미래를 염두에 둔 새로운 원칙으로 일본은 인종 평등을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에 구미의 식민지가 퍼져가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제안은 각국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습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각국의 대표단을 앞에 두고 일본 전권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는 의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곤란한 현상 아래 있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내건 커다란 이상은 세기를 넘어 지금 국제 인권규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돼 있습니다.(<아사히신문> 105, 연설 전문 게재)

 

1차 세계대전 뒤인 1919118일 파리에서 전쟁 뒤처리를 위해 열린 강화회의에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일본이 전승국이 된 것은, 영국과 맺은 동맹(영일동맹, 1902~1923) 덕이었다. 영국이 독일이 중심이 돼 싸운 그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맞서려고 영국은 일본을 끌어들였다. 그때 일본은 유럽전선 참전 조건으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산둥반도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태평양 섬들에 대한 권익을 요구했고, 비밀조약으로 그것을 확약받았다. 유럽전선에 묶인 독일로부터 그 지역 권익을 거의 그저 차지한 일본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주창했다는 인종 평등의 실상은 물론 아베가 자랑스레 주장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2019년 올해가 바로 3·1운동 100주년이니, 일본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지배 확장에 반대하며 인종 평등을 고창(高唱)했다는 그 회의 기간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조선민족의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여운형 등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 등의 대표단을 파리에 보내 조선독립을 요구했고, 그해 4월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수립됐다. 알다시피 일제는 그 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파리 강화회의는 그때도 진행중이었다. 아베가 자랑스레 얘기한 것은 그때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도한 강화회의 국제연맹 규약의 인종평등 조항 채택 때 일본 대표가 활약을 했다는 얘기다. 그 덕에 지금 인권규약이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됐다는 얘긴데, 한마디로 낯간지러운 얘기다. 그때 일본이 정말로 확보하고자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얘기를 하려면 2차 세계대전 뒤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얘기부터 하는 살피는 게 좋다.

1차대전 뒤 파리 강화회의 때 일본의 동맹국으로 일본편을 들었던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조약은 19519월 체결, 19524월 발효) , 미국이 마련한 조약 초안의 전승국(서명국) 명단에 들어 있던 한국을 삭제할 때도 일본편을 들었다.

그렇다. 한국은 원래 전승국의 일원이었다.(그럴 뻔했다.) 그때 한국이 그대로 전승국으로 강화회의에 초청받아 조약에 서명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일합방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들이 국제법상 불법이 되고 일본은 한국에 당연히 전쟁 배상을 했을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합법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 독립축하금이니 경제협력금명목의 돈 얼마 받기로 공모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이나 12·28 ‘위안부합의 같은 거래도 있을 수 없고,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첨단소재 수출규제 공세로 인한 지금의 한일 갈등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한일갈등, 꼬인 한일관계를 풀려면 이렇게 돼 온 경위를 알아야 한다, 그 역사를 알아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때 영국은 한국이 서명국에 포함되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합법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구미(유럽과 미국)의 식민지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분출될 것이라며 한국이 서명국이 되는데 반대했다.(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 <세카이世界> 201910월호) 일본과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었던 제국주의국가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를 잃게 될까봐 한국의 조약 서명뿐만 아니라 독립 자체를 반대했다. 카이로 회담이나 얄타, 포츠담 회의 때도 그랬다. 베트남의 분단과 전쟁의 비극도 결국 프랑스가 그 비슷한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일어났고, 미국이 냉전전략 때문에 끼어들면서 커진 것 아닌가. 한국의 분단과 전쟁도 기본 골격은 그와 다를 게 없다.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상호 보장해 준 미국과 일본의 암거래였듯이, 1902년 영일동맹 체결 때 영국과 일본은 인도와 조선을 두고 서로 주고받는 암거래를 했다.

1945년 생으로 교토외국어대에서 미국사를 가르친 마쓰다 다케시松田武<대미의존의 기원-미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2015, 이와나미서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대일 강화조약 교섭 과정에서 영국 총사령부의 연락사절 정치부문 대표 앨버리 개스코인과 회담하면서, 일본국민에게는 앵글로 색슨 민족의 엘리트 클럽정회원으로 대우받고 싶다는 강력한 바람(願望)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지도자(덜레스)후진국이라거나 저개발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데에 일본국민은 과민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민한 덜레스는 일본이 공산국들보다 우수한 자유세계의 나라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에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 그는 중국인이나 조선인(한국인), 그리고 러시아인보다 인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일본인의 국민감정을 이용할작정이었다. 덜레스는 일본인의 인종에 대한 특별한 감정과 이중기준을 충분히 이용함으로써 일본을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서양세계가 껴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덜레스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인종의 서열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종차별감정이나 제국주의관과 관련해 덜레스와 요시다 같은 보수적인 일본 엘리트들 간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인종의 서열론은 세계가 인종적으로 계층화된 다종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는 전제 위에, 앵글로 색슨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해 보이는 일본인들의 이웃 아시아인들에 대한 멸시나 근거없는 우월감 조성엔 미국도 깊숙이 관여했다. 정병준의 <독도 1947>(돌베개, 2010)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덜레스에게 건네준 비망록(‘한국과 평화조약’)이 인용돼 있다.

미국이 다가올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국에 한국을 참가시키기 위해 초청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이 문제를 재고해 주길 희망한다.

한국은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의 종결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소위 해방된 국가들(특별지위국)’의 하나다. 이 나라는 일본과 전쟁상태나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에 연합국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에 달하는 한국인 거주자 수(종전 무렵에는 거의 150)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는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종차별주의자 요시다는 역시 인종차별주의자인 덜레스에게 재일 한국인들이 빨갱이라며, 한국을 만일에 서명국(전승국)에 포함시킬 경우 최대 150만에 이르는 그 빨갱이들이 일본을 덜레스가 희망하는 반공친미의 냉전 보루가 아니라 반미공산국가로 만들 것이라면서 그를 압박했다. 그때 이미 한국·일본을 포함해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는 선악과 정의·불의를 가르는 기준이 진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빨갱이냐 아니냐였다. 한국이 일본의 교전국이 아니라는 요시다의 말은 거짓이다. 한국민은 19세기 일본의 침략 이래 줄기차게 항전했다. 1919년엔 3·1운동을 일으켰고 망명정부를 수립했으며, 만주와 화북, 시베리아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일본군과 계속 싸웠다. 덜레스가 당시 조약 초안에 한국을 전승국(서명국)에 포함시킨 것은 그때 미 국무부도 한국이 전승국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분개할 것이라고 한 당시의 일반정서를 감안한 것이며, 그런 내용은 국무부 문서로도 남아 있다. 하지만 덜레스는 막판에 한국(조선)을 버리고 일본을 잡았다.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으므로, 덜레스는 한국을 공산진영 확장에 맞서 싸우는 최전선국가로 서명국에 포함시키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강력한 반대와 영국의 일본 지지로 그 카드를 버렸다.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강력히 항의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아주 버리기엔 마음이 켕겼던지 덜레스(당시 국무장관 고문, 나중에 국무장관)는 일본과 직접 교전상태에 있었던 건 아니라는 이유(요시다가 주장한 이유)로 한국에게 서명할 자격을 주진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고려를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갖고 있으니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한다면서 회의장 방청석 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우쓰미 아이코) 한창 전쟁 중인 약소국, 미국의 도움 없이는 금방 소멸해 버릴 처지의 풍전등화였던 한국을, 미국은 회의 당사자가 아니라 방청객으로 밀어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배제당한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배상문제는 그렇게 해서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 보수우파를 앞세운 미일동맹이 지배한 그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이후 70여년 간 한국·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하위체제라 할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미국은 절박했던 최빈국 한국을 일본 엔경제권에 편입시키면서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와 강제노역 동원·징병 등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배와 수탈을 문제삼지 않았다.

요시다 시게루는 지금 아베 내각의 2인자라는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외조부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는 미국 국가정보국(CIA)이 주도한 일본 보수정당 대연합(보수합동)에 앞장서서 자민당 장기집권체제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A급 전범자 기시 노부스케다. 지금 일본을 지배하는 그 손자들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바로 그들 조부가 추구했던 세계다.

 

2차 세계대전 뒤 덜레스가 우생학이 유행하던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만연했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적 인종우열론을 적극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그의 1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차대전 뒤의 파리 강화회의에 미국 대표단의 교섭위원으로 참석한 유명한 국제변호사였다. 그때 덜레스는 일본의 인종 평등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했다. 아베 총리가 미국 1500만의 유색인종이 인종평등을 향한 일본의 분투를 응원하고 있었다고 그럴싸하게 얘기했지만, 알다시피 미국의 유색인종이 평등을 내놓고 얘기하며 싸우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아베가 얘기한 그 유색인종은 딱히 피부색깔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아 수탈당하는 피억압자, 소수자, 약소민족을 가리킬 것이다. 덜레스는 그때 일본인들이 실은 그들과 같은 부류로 언급되거나 취급당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혐오하면서 백인, 그 중에서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앵글로 색슨족과 동등한 대우를 백인들로부터 받고자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그 서양 백인 콤플렉스(열등감)를 적극 활용하면 일본을 친미 국가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한국),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를 분열·대립시켜 조종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도 용이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베가 낯 두껍게 자화자찬한 파리 강화회의 때 일본의 인종 평등주장은 소수자, 피억압자의 해방과 평등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 자신들을 백인과 동등한 인종으로 대우해 달라는 요구였다. 일본이 추구한 것은 인종차별주의 자체의 철폐가 아니라 자신들이 우월적 백인 그룹에 들어감으로서 나머지 유색인종들을 더욱 확실히 차별하기 위한(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더욱 굴절된 인종차별주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때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당시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늙은 너구리(능구렁이)’였던 덜레스를 대일 교섭담당관으로 임명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마니교의 선악(善惡) 2원론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덜레스는 당시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을 절대악으로 규정한 동서 냉전의 최전선 지휘관이 됐다. 그의 목표는 그런 사회주의 절대악을 분쇄하는 것이었고, 그 차가운 전쟁의 동아시아태평양 핵심 거점으로 일본을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덜레스는 냉전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로 일본과 함께 독일을 꼽았다. 높은 공업력·기술력을 지닌 그들 나라가 소련쪽으로 기울 경우 미국은 고립되고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본 그는 공산주의와의 성전에서 승리의 열쇠를 쥔 나라들이 바로 독일과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미국의 국익과 안보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나라로 간주했다. 그 일본을 확실히 포섭할 수 있다면 한국의 전승국 지위 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2차대전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졸지에 미국이 적극 육성해야 할 핵심 동맹국으로 바뀌었고 전범자들은 복귀했다. 도조 히데키 등과 함께 도쿄 스가모 감옥에 갇혀 있던 A급 전범자 기시 노부스케가 19481223일 도조 등 7명의 A급 전범자들이 처형당한 직후 석방돼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당시 요시다 정권의 관방장관. 1960년대에 장수 총리가 된다)를 찾아가고 1960년 미일 안보동맹 재강화를 주도한 일본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스 잔재를 청산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미국은 군국일본 전범자들에겐 관대했다.

왜 미국은 전범국 일본에 관대했을까? 덜레스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1차 세계대전 뒤의 파리 강화조약 때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청산과 배상을 강요한 전승국들의 전후처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 강화회의에 직접 관여했던 덜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무명의 히틀러가 힘을 얻고 나치스가 대중들의 열광 속에 독일과 유럽을 석권하면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것은 파리 강화회의 때의 독일에 대한 가혹한 징벌적 전범 청산 강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덜레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그의 관대는 거기서 비롯됐고, 대일교섭 담당자로서 가부장적 천황제라는 일본적 특수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미국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범죄 청산 등 역사적 정의구현이 아니라 일본을 철저히 친미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본의 자발적인 친미 예속을 유도해 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덜레스는 계산했다.

덜레스는 일본 국민이 서양인과 동등하다고 느끼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일본은 서방의 일원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들(일본국민)을 열등한 민족으로 계속 취급한다면 () 그들이 갈망하고 있는 평등한 대우를 거부한다면, (대일 강화)조약은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동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 대일 강화조약 1년 전인 1950년에 덜레스는 이것(일본국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에 실패하면 우리는 일본을 소련 진영에 내 주게 될 것이다. 왜냐면 소련이 일본국민을 평등하게 대우해 주겠다고 나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그는 대일 강화조약 교섭에서 일본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불문에 붙이고 오히려 일본인의 인종차별관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이용했던 것이다. 덜레스의 도박은 나중에 미일관계의 딜레마, 자립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불만과 자립하는 일본에 대한 위구(危懼. 염려와 두려움)’가 돼 미국 지도자들을 괴롭히게 된다.”(<대미의존의 기원>)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고민에 빠져 있다. 주일 미군을 위한 군사비(방위비)를 대폭 늘리지 않는 데에 대한 불만이 크지만, 만일 일본이 군비를 대폭 증강해 군사적으로 독립하게 된다면 그때는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어쨌든 덜레스를 비롯한 미국 전략가들이 일본을 영속적인 친미 예속국가로 만들기(‘소프트 피스’soft peace) 위한 필요조건을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본경제에 과도한 부담이 될 정도로 전쟁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차단하며, 문화관계를 확대·발전시킨다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강화조약 제14조에서 일본의 배상 의무를 최소화했다. “존립 가능한 (일본)경제를 유지하려면, 현재의 일본 자원은 일본국이 발생시킨 모든 손해 및 고통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실행하고 동시에 다른 채무를 이행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명기했다. “여러분이 만일 배상을 기대하고 일본의 경제적 자립을 제한하고일본의 선박을 해상에서 쫓아내고, 직물공장을 봉쇄하게 만든다면, 당신들은 오직 숙원(宿怨. 오래 묵은 원한)을 부를 뿐인 평화를 창출하는 것이며, 결국은 일본을 러시아의 세력권 내로 쫓아내게 될 것이다.” 덜레스는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를 극구 반대했다. 한국과 중국(대륙과 대만 모두)이 모두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게 일본의 배상금 지불을 줄이기 위한 미국의 계산과도 연관이 있는진 모르겠으나, 미국은 그렇게 해서 아낀 돈을 일본경제 재건에 쏟아부었다.

회의에 초청 받지도 못한 한국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 거론도 되지 않은 건 당연했다. 피해자들이 강제노동 현장에서 차별적인 저임금을 받았고 그나마 저축이란 형식으로 강제 적립한 그 돈마저 결국 돌려받지 못했으며, 연금 같은 전후 보상 혜택에서도 제외된 비극은 철저히 잊혀졌다. 그들 중 어렵게 근거 서류를 확보한 극히 일부가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후였다. 민주화 이전 한일협정 체결의 당사자로, 한일 유착을 배경으로 정치세력화한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그런 소송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런데 그때의 강제노동 현장에는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 노동자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의 병사들도 강제노동 현장에 동원됐는데 그 수가 37567(3415명은 사망)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그들 구미 포로들에겐 개인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화조약에 명기(16)했고, 일본은 해외자산을 팔아 203599명의 포로 출신자들에게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모두 개인 배상금을 지불했다.(우쓰미 아이코) 그들 포로 감시인으로 징병당한 한국인들 다수는 일본 패전 뒤 포로 학대죄로 BC급 전범이 돼 사형당했고 그들의 일본인 상급자들은 오히려 살아남았다. 일본이나 미국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존자는 몇 명인지, 배상이나 보상은 받았는지 기본적인 조사조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본국이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 권리를 가지는 주권국임을 인정한다는 강화조약 제5조는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위한 것이었다.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으로 미국은 패전국 일본 점령통치기간에 확보했던 중요한 권리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덜레스의 미국이 바란 것은 우리가 원하는 장소, 원하는 기간에, 원하는 만큼의 군대(미군)를 주둔시키는 권리를 손에 넣는 것이 그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미국의 기지국가가 됐고, 한국은 분단된 동족과 대립하면서 그 기지국가를 지키는 기지가 됐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의 기본조약 제2조는 “19108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말을 한국쪽에선 1910한일합병과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은 무효 즉 불법으로 해석하고, 일본은 일본 패전 때까지는 유효 즉 합법이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각자 해석해서 자국민들을 설득하기로 그때 합의했다. 한국 쪽 해석대로라면 을사늑약이나 합방조약 등은 모두 불법이고 한반도 점령과 식민지배도 일방적 침략이며 수탈이 된다. 따라서 일본은 그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쪽 해석대로라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은 합법이었으므로 배상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 한일협정 교섭 과정에서 이른바 구보다 망언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한반도를 발전시킨 축복이었으며 일본의 지배 덕에 오늘날의 한국 발전도 가능했다는 그 후안무치한 식민사관 레토릭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이 교묘한 절충과 더불어 한일은 무상 3, 유상 2억달러로 합의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것도 일본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 배상금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은 그것은 그야말로 양국 민간의 재산문제 처리일 뿐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며, 또 그 협정으로 해소된 것은 양국 정부의 그 문제에 관한 외교보호권일 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리는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동의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한일협정 체결로 한일간의 배상문제 등 모든 것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일본 기업들에 대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 배상 청구소송에 원고 승소 확정판결을 내린 한국 대법원과 한국 정부를 게임에서 골대를 마음대로 옮기는국제법 위반이라 비난·비판을 계속하고 있는 일본 정부 쪽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골대를 자기 마음대로 옮기는 쪽은 오히려 일본 정부라고 관련 소송을 맡은 일본 변호사들도 얘기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그 주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지금까지 일본 쪽 주장이 통용돼 왔고 한국 쪽에서 정식으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 주임분석관 출신인 사토 마사루는 길게 보면 외교란 국력과 국력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그런 원리에 따른다면 이제까지는 일본의 국력이 한국의 국력을 크게 능가했기 때문에 균형점이 일본쪽으로 훨씬 기울어진 지점에서 형성된 셈이 된다.

 

미국도 언제나 일본 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한일협정을 압박했고,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한일의 무조건적 융합을 촉구하고 압박을 가한 것이 미국이었다. 20151228일 한일 정부가 위안부에 관한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인합의에 서명한 데에도 미국의 강력한 압력이 작용했다. 그때 오바마 정부의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 한국과 중국을 겨냥해 과거사 문제를 현실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면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정리를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2016년에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을 압박한 것도 미국이고, 한국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가장 화를 낸 것도 미국이다.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바로 그런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못박은 것이며, 그 핵심 논거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즉 그 이미 무효는 한국 쪽 해석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근대에 한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협정)들은 불법 침략으로 강제한 것이며 따라서 무효라면 배상하는 게 당연하다. 예전에 어떤 정치적 거래가 이뤄졌든 식민지배나 전쟁범죄 등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개인 배상 청구권은 인정돼야 한다는 건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지난 8한국이 적인가라는 타이틀로 발표된 일본 시민 8404(814일 현재)이 찬성, 서명한 선언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했다.

일본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피해 증언 뒤 고노 담화를 통해 관과 군의 강제동원과 위안소 운영 및 학대 사실을 인정했으며, 1993년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뒤 등장한 비자민 연립정권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도 일본의 전쟁범죄를 인정했다. 1995년엔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됐고, 1998년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준이치로 평양선언, 한일합병 100년을 맞은 2010년엔 간 나오토 총리 담화가 발표됐다. 한일은 협의를 통한 문제해결 가닥을 잡는 듯 보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가 그런 변화를 촉발하고 압박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동아시아 냉전체제 연장과 미국의 중국 견제 등에 따른 신냉전의 반동적 흐름에 편승한 아베 정권의 등장과 함께 부정되고 역사는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본 월간지 중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文藝春秋)> 201910월호 총력 특집은 그 역회전이 어떤 지점에 도달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그 특집의 타이틀은 일한(日韓) 단절-분격과 배신의 조선반도’. “계속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迷走) 문재인 정권, 이미 우호국이라 부를 수 없는 이웃나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도입문구를 단 그 특집의 첫 글을 기고한 수학자이자 작가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글 일본과 한국 국가의 품격’”문재인 정권의 무시무시한 반일 공세에선 광기마저 느낀다며 저주에 가까운 험담을 늘어 놓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왜곡·날조 구절들은 치졸하기까지 하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살펴 봅시다. 조선반도는 산이 많은 지형으로, 전 국토의 75%를 산지가 차지합니다. 일본처럼 삼림자원이 풍부하다면 좋겠는데,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식림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일본이 통치시대에 식림하기까지는 민둥산뿐이었습니다. 토지가 척박해서 일본이 통치시대에 농업을 근대화할 때까지 극히 낮은 생산량을 기록했습니다.”

 

이 나이든 수학자는 이런 환경에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숙명 때문에 한반도는 사대주의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조선이 주체적 국가로 존재한 시기는 청일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1895)으로 (일본 덕에)‘독립 자주로 인정받기까지 조선은 대부분의 기간에 중국의 속국이었다며, 19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이 준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한국인은 그 누구도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20세기의 저열한 식민사관을 계속 늘어 놓으면서 그는 지금의 한일관계 파탄도 이천년 이상 배양된 한국의 그런 민족감각 탓으로 돌린다. 아직도 이런 지독한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하는 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일본 매스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일본 우파들의 주장과 담론들 대세가 이런 정도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로 충격적이다. 그들의 시선(관점)과 인식 및 지적 수준은 여전히 패전 이전 대일본제국시대의 그것과 다를 게 없거나 오히려 떨어진다.

 

일본이 총체적으로 열화(劣化)하고 있다는 우려는 일본 지식사회에서도 나오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등 온라인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이른바 넷 우익들의 언설들을 보면 과거사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잘못된 역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베 정권이 위험한 것은 그들의 정치권력을 정점으로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회의등 우파세력이 그런 상황과 흐름을 방조하거나 적극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한국 보수우익 세력 가운데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보수우익 월간지 특집의 머릿글이 이 모양인데, 그 다음은 앞서 얘기한 사토 마사루군사협정(GSOMIA) 파기, 문 정권은 외교전에서 패했다”, 마지막 글이 문재인으로는 대한민국이 지구에서 소멸한다-지일파 엘리트가 폭로하는 반일정권의 무시무시한 참상이다. 이 글은 국정원 간부임을 시사하는 익명의 한국 정부 고관이 각오하고 털어놓는 고발을 정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목부터 그렇지만 병적으로 냉전적 사고에 찌든 정체불명 우익 인사를 빙자한 전형적인 반 문재인정권 선동이다.

이 잡지는 지난 4월에도 한일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를 특집으로 꾸민 특별호를 냈다. 한일관계와 국제문제에 관한 저급한 인식 수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이런 연속적인 특집들을 훑어 보노라면, 기획자들의 궁극적 목표가 그들이 주장하는 반일적한국 좌파 정권의 전복과 친일우파 정부로의 정권 교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일본 우파는 자신들을 시대변화에 맞춰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웃나라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바꾸려는 시대착오적이고 내정간섭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8월 말에 아베 정권 대변지라는 <산케이신문>에 문재인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기명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그 세계인식과 사고 수준 또한 문예춘추의 노골적인 우익 선동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혐한·혐중과 얽혀 있는 일본 대중매체들의 이런 저급한 수준의 담론들이 일본회의이데올로그들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까. 문제는 아베 정권 각료들과 그 주변이 일본회의 멤버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저급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은, 별 문제될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얼마 전 중의원 10선 의원을 지낸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이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아베가 독주하는 지금의 일본 정치에 대해 논의가 사라져 (태평양)전쟁 말기와 똑같다어떤 사람(아베 총리)이 말하면 전부 찬성하고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한국 내에도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일본 우파들에 동조하거나 손잡는 세력이 적지않게 포진해 있다면? 그들간의 한일 공조를 걱정하는 건 기우(杞憂)일까.

이런 가운데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의 급속 성장으로 예전의 압도적 일본 우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베 정권이 주도해 온 일본의 최근 변화가 바로 그런 변화에 따른 위기감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지적들도 적지 않은데, 어쨌거나 외교는 국력과 국력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사토 마사루외교 원리개념을 또 빌리자면, 지금 한일갈등을 둘러싼 외교전도 국력 변화를 반영해 예전만큼 일본 뜻대로 돌아가진 않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이 잘못돼 가는 흐름을 저지하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를 규정해온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1965년 한일협정 체제. 이미 흔들리고 있는 그 체제들을 해체하고 재구축해야 한다. 그 핵심은 미국의 냉전전략에 따라 무시되고 은폐돼 온 일본의 전쟁범죄와 불법적인 아시아 침략 역사를 사실대로 드러내고 재정립하는 일이다. 그 바탕 위에 비로소 일본은 바로 설 수 있으며,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도 바로설 수 있다. 한반도 및 중국의 분단 해소와 동아시아 공동체 추구라는 미래지향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 미국의 패권적 폭주는 견제돼야 한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낼 힘의 구축은 한국의 촛불혁명과 같은 각 지역 및 국가의 시민혁명이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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